2023/4/17

 

 

 

세 번째 배경은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난 데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낙하하고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한다.(28-29p)

 

 

어떤 장면에서 남녀가 서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분명히 호감이 있다는 묘사다. 그런데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반론했단다.

“그런데 누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했으니 호감은 아닌 것 같아요. 좋아한다면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트위터에서도 암묵적인 비유, 풍자, 우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관찰된다. 이를테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유명인에 대해 누군가가 “이 사람은 구석기시대에서 왔나?”라는 풍자적인 글을 올리자 “뭐?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하고 댓글을 단다.(73-74p)

 

 

예전보다 관객이 유치해졌고, 그에 따라 설명이 과도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관객’이 있다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로 나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다.

20년 전, 30년 전에도 ‘유치한 관객’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유치함을 작품 탓으로 돌릴 수단이 없었다. 2000년대 초에도 블로그와 익명 게시판은 있었으나 다수의 민심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생겨나고 보급되면서 누구나 무료로 작품에 감상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가장 하기 쉬운 말이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없었다)”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감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이에 동조하고 부응하는 의견이 많아질수록 투자자나 제작자는 이 의견을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관객으로 붙잡기 위해 작품에 설명식 대사가 늘어난다.(82-83p)

 

 

“작품을 칭찬하는 쪽보다 비판하는 쪽이 우위를 차지하죠.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다니’하고 분노하면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게다가 피해 사례는 온라인에서 동조자를 구하기도 쉬워요.”

SNS의 탄생으로 사실상 아무런 비용 없이 간단하게 ‘피해 사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막고,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리뷰를 피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뿐이다.(84-85p)

 

 

원작 만화의 대사를 최대한 살려 충실하게 영상화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즘은 영상화하면서 대사를 바꾸면 그것이 적절한 각색의 범위 내여도 원작 팬이 ‘원작 파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처음부터 ‘원작 그대로’가는 것이 무난하다.(91p)

 

 

“옛날 사람들이 빨리 감기를 한 건 자신을 위해서였죠. 콘텐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보고 만족하려고요. 그런데 요즘은 무리에 속해야 안심이 되니까 빨리 감기를 합니다. 생존 전략인 거죠.”

노래방에서 진심으로 부르고 싶은 곡이 아니라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인기곡을 선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작품의 감상자가 아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콘텐츠를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한 소비자다.(111p)

 

 

요컨대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적은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말이다. 발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적은 탓에 화제로 발전하기 어렵다.

“아이돌 그룹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영화,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화제로 삼기에는 훨씬 낫지요.”

너무 개성적인 개성은 개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113-114p)

 

 

1980년대나 1990년대에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에 속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주류 집단에 속해 있거나 다수와 비슷한 기호를 가지면 크게 틀릴 일이 없다. 모두가 투표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유명한 간식을 먹고, 모두가 보는 드라마를 보는 식이다. 다들 좋다고 하는 것이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 실패하더라도 모두 같이 창피를 당하니 그리 부끄럽지도 않다. 모두가 같이 불평을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적으로 주류가 사라졌다. 가치관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보니 취미나 취향이 완전히 나누어져 ‘압도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

‘보통’을 잃어버렸죠. 결과적으로 개성이 없으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매우 불안합니다. 그런 불안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취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애써요.

(...)

인기 있는 블로거, 일러스트에 ‘좋아요’가 끊이지 않는 작가, 박식함을 내세운 유튜버, 반짝이는 교우 관계를 자랑하는 학생 기업가 등 ‘개성 있는’사람들과 ‘개성 없는’자신을 비교하면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나 그 위 세대가 ‘라이벌’로 삼은 것은 교실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Z세대에게는 SNS에서 유명한 또래들이 모두 라이벌이 된다.(116-118p)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수록 ‘틀리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엄격하게 비판받거나 비웃음을 사는 참상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상도 하기 전에 리뷰 사이트를 읽고 범인을 알아둔다. ‘정답’을 알고 싶어서. “그들은 빠른 정답만 원한다”라고 젊은이들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상처받기를 꺼린다. 창피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126p)

 

 

결국 영상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분명 공감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 이해하게 되는 것도 감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161p)

 

 

그들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즉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행위가 결여되어 있다. 관용이 아니라 단지 연결을 피하는 것뿐이다.

(...)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쾌하다’며 곧장 비명을 지른다. 이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일종의 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183p)

 

 

 

ㅡ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中,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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