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19

 

 

음식 얘기는 한 권의 책을 위한 구색이고 생각보다 너무 기초적인 얘기를 함. 대상 독자가 내 예상보다는 어리거나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쓴 책인 듯.

 

 

요즘 미국을 비롯한 부자 나라 사람들은 ‘바나나 리퍼블릭’을 의류 브랜드 이름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원래 부자 나라의 거대 기업들이 가난한 개발도상국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던 어두운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이 의류 브랜드의 이름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좋게 봐 줄 수도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굉장히 모욕적이고 불쾌하다. 뭐랄까, 커피 원두를 갈아 주는 힙한 가게를 ‘사탄의 공장’이라고 부르거나 고급 선글라스 가게를 ‘암흑의 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사탄의 공장’은 영국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 착취가 심한 공장들을 일컬은 말이다. 이 시기에 공장들이 물레방아를 이용한 수력을 쓴 곳이 많아서 공장을 ‘물레방앗간’이란 뜻의 ‘Mill’이라고 많이 불렀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예루살렘>에서 ‘dark satanic mills’라는 표현을 써서 유명해졌다. ‘암흑의 대륙’은 유럽인이 19세기 이전의 아프리카를 부르는 표현으로 유럽 중심적 무지함이 배어 있다)(188p)

 

 

요컨대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것ㅡ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요리를 준다든지, 복강병을 가진 사람에게 밀가루 빵을 준다든지, 남녀 화장실을 같은 크기로 만든다든지 하는 것ㅡ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일이다. 아에로플로트 승무원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특별 대우가 아니다. 그것은 공평함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기내식 메뉴에 채식 요리를 포함시키는 것, 글루텐이 들지 않은 빵을 준비하는 것, 여자 화장실을 더 크게 더 많이 짓는 것은 채식주의자나 만성 소화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여성을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를 보장해 주는 일일 뿐이다.(238-239p)

 

 

우리는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뭔가를 당연시하면 그것의 중요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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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무보수 돌봄 노동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국내총생산)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한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측정법과 마찬가지로 GDP도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결정할 때 시장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시장 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농민이 자기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이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 말이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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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ㅡ그리고 사회ㅡ에 하는 공헌이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가사 노동의 존재 자체를 ‘보지 않으려는’경향은 ‘직장맘’ 또는 ‘워킹맘’이라는 표현에도 드러난다. 마치 집에 있는 엄마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ᄁᆞᆯ고 있는 말 아닌가. 이런 잘못된 표현 때문에 집에서 여성이 감당하는 돌봄 노동의 양이 밖에서 남성 배우자가 하는 임금 노동의 양보다 더 많은 경우가 빈번함에도 집에 있는 여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성차별적 편견이 강화된다.(255-257p)

 

 

 

 

ㅡ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中,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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