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24

 

 

변이가 누적되어 종의 진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변이가 유전되어야만 한다. 다윈은 일찍이 <종의 기원>에서 표현형의 변이를 품종에 의한 변이(유전변이)와 환경에 의한 변이로 구분했고 야생에서나 인간에 의한 품종 개량 과정에서 관찰되는 많은 변이 중에서도 유전변이에 주목했다. 그리고 유전변이만이 환경의 동요에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재료임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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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연속성은 유전의 성공으로부터 나오며 생명의 다양성은 유전의 실패에서 나온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포도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한다. DNA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DNA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 진화란 이러한 유전의 실수와 실패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해낸 생명의 프로그래머라고 할 수 있다. 수십억 년 동안 생명체의 실수와 실패가 진화 프로그래머에 의해 창조적으로 누적되며 지구상에 무수히 다양한 유전체의 생명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29-30p)

 

 

한때 높은 치사율로 악명을 떨쳤던 HIV 바이러스 감염은 흔히 ‘칵테일 요법’이라고 불리는 고활성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을 통해 일종의 만성질환처럼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자리 잡았고 감염자들의 생존 기간도 훨씬 길어지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HIV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생존하면서 HIV도 숙주의 몸에서 진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됐다.(72p)

 

 

그러나 지능 연관 유전변이의 발견이 곧 ‘유전자 결정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선 지능의 유전율은 100퍼센트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즉,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더 중요한 점은 유전율과 유전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암기 중심의 교육 과정이라는 ‘환경’에서 기억을 강화시키는 유전변이는 학력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암기에 덜 의존하는 교육 과정으로 환경이 변하면 유전변이의 효과 또한 감소될 수 있다. 따라서 지능의 유전학은 우생학적으로 해석될 위험성이 있지만 오히려 유전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교육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국가가 장애 아동에게 특수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지니는 것처럼, 유전적 차이가 교육을 통해 불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교육 시스템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집단유전학은 유전자와 교육 환경의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유전적으로 정의로운’ 교육 시스템을 찾아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88-89p)

 

 

암세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세포 생물의 몸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진화의 압력 때문이다. 변이와 경쟁으로 생식의 차별적 성공이 이뤄지는 곳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다세포 생물의 몸은 바로 이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체세포들은 같은 수정란에서 만들어진 ‘클론’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DNA를 지닐 수 있다. DNA 복제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 방사선, 활성산소, 화학 물질 등으로 인한 손상으로 DNA 염기서열이 변화하는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DNA 메틸화와 염색질을 구성하는 히스톤 단백질의 변화 등을 통한 후성유전적 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문제는 변이 중 일부는 세포 증식을 증가시키며 이러한 변이를 획득하여 주어진 의무를 저버리고 세력 확장에 골몰하는 세포들이 몸속에서 더 높은 적응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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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대도시에서 무수히 많은 신호등이 체계적으로 작동하여 교통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처럼 다세포 생물의 몸에서 성장 촉진 신호와 성장 억제 신호는 정확한 때와 장소에서 만들어지고 전달되어 조직을 이루는 세포의 분열을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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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무한히 증식하는 암세포가 되기 위해서는 세포 분열을 조절하는 신호 체계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이를 조작해야 한다. 암의 두 가지 특징, ‘성장 촉진 신호의 자기 충족’과 ‘성장 억제 신호에 대한 둔감화’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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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세 가지 전환을 모두 이뤄내더라도 세포 군집이 폭발적인 증식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장벽을 더 넘어야 한다. 바로 텔로미어의 마모다. 정상 세포는 무한히 분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섬유아세포를 체외에서 배양하면 세포들은 분열을 거듭하다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지면서 결국 증식을 멈추고 세포 노쇠 단계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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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분열 신호등을 조작하더라도 무한대의 증식을 이어가지 못하고 위기에 빠지는 이유는 세포 분열을 거듭할 때마다 염색체 양 끝 DNA를 이루는 텔로미어 사슬이 점점 짧아지다 완전히 마모되기 때문이다. 텔로미어가 다 닳아버린 세포는 염색체 간의 비정상적인 융합을 막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기 단계에 빠진 세포 중 극소수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무한히 분열하는 ‘불멸의 세포’가 된다.(208-214p)

 

 

인간에서도 다른 모든 조절 기제와 마찬가지로 성별 결정 체계 또한 완벽하지 않다. 유전변이 등으로 성별 결정 기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성염색체, 생식선, 생식기 등에서 양성의 특징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성 발달 이상(DSD)이 일어날 수 있다.

성별 구분이 모호한 DSD가 드물게 일어나는 ‘몸’의 성별과 달리 ‘마음’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성별 구분이 모호하다. 마음의 성별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려면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사이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마음의 물리적 기반인 ‘뇌’에 불연속적이고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뇌를 이루는 세포의 수, 종류,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연결, 즉 ‘신경회로’의 구성과 작동에 있어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차이는 기술적으로 검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난해하다. 신경회로는 다른 어떤 생물학적 체계보다도 환경적인 요소, 특히 ‘경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으며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호르몬이 뇌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고 또 인지와 행동에 있어서 양성 간의 평균적인 차이가 분명 관찰되지만 이러한 ‘평균적인’차이로부터 마음의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오히려 마음의 성별은 마치 ‘키’처럼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 관찰되는 현실에 더 가깝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성’과 ‘젠더’의 불일치다. 일반적으로 성과 젠더가 구분되어 사용될 때 전자는 생식 기관을 비롯한 ‘신체적인’ 성별을 의미하고, 후자는 자신을 스스로 어떤 성별이라고 느끼고 표상하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심리적인’ 성별에 해당한다. 몸의 성별과 마음의 성별, 즉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시스젠더로, 서로 상반되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분류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10만 명당 약 390명이 트랜스젠더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미국에서만 무려 100만 명 내외의 사람이 성과 젠더가 불일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적 지향성의 다양성 또한 몸의 성별에서는 관찰하기 어려운 특징이다. 정자와 난자의 이형접합만이 성체로 발생할 수 있는 수정란을 형성하는 것과 달리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성적 지향성은 다른 성별뿐만 아니라 같은 성별 혹은 두 성별 모두를 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적 지향성의 다양성은 젠더 정체성의 차이보다 훨씬 빈번하게 나타난다. 인구의 2퍼센트에서 10퍼센트 정도가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39-241p)

 

 

 

 

ㅡ 이대한,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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