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31

 

 

 

그는 2021년에 60세를 맞아 스스로 통과의례를 기획했다. ‘돌아온 말들’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 중 기억에 남아 있는 말을 나에게 들려주세요”라고 요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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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앉아 생각만 해서는 모르잖아요. 일반적인 생애 경로와 다른 삶을 살수록 여행이든 이벤트든 스스로 인생의 매듭을 만들어서 자기를 낯설게 보는 훈련을 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31p)

 

 

‘소신 있게,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에이징 솔로 여성이 많음에도,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러한 자기 인식과 격차가 크다.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중년인데도 혼자 사는 것을 일시적 상태라고 간주하거나 혼자서 일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시선이 여전하다.(35p)

 

 

사실 나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비혼주의자도 아니다. 결혼과 비혼이라는 삶의 방식에 어떠한 신념을 갖고 굳게 지키겠다는 ‘~주의’를 붙이는 사람을 존중하기는 해도 좀 어색하다고 느낀다. 자기 삶에서 친밀한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꾸려가느냐 하는 문제는 때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나는 오래 혼자 살아왔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될 수도 있고 다시 혼자 살게 될 수도 있으며, 친밀한 누군가와 함께 살지는 않되 가까이에서 지내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고 언제든 바뀔 수 있다.(38p)

 

 

“1990년대 후반 PC통신에서 만난 친구들과 쭉 같이 놀았어요. 우리 사이의 제일 큰 공감대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었어요. 사실 허세죠. 다 적당한 형편에서 자랐고, 대학교를 다녔던 1990년대 초반 개방적이었던 사회 분위기의 수혜자들이니까요.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자산 축적을 최고로 치는 사회가 됐잖아요. 그런 변화가 못마땅하지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하기 싫어’ 같은 태도로 살던 친구들이었죠. 주제 파악은 잘되는데 개선하려는 의지는 없고, 인생을 사는 태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순응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 친구들 중에 비혼이 많아요.(48-49p)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 사정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원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족 중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저는 결혼이 자본과 집안 간 결합,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주위 결혼한 사람들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의심도 있고요. 나 스스로는 팔릴 만한 학벌이나 직장을 가졌다고 해도 나의 원가족이 평가받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계약에서 꿀리고 들어가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내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선택했어요.(53p)

 

 

“나는 비혼을 선택한 게 아니라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들 결혼하는 게 기본이고 결혼하지 않는 게 선택인 양 말하는데, 거꾸로 아닌가요? 뭔가를 하겠다고 하는 게 선택이죠. 저는 비혼을 선택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결혼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고 그냥 그 상태로 쭉 사는 거예요.(54p)

 

 

‘결혼과 출산 적령기’를 지난 50대 중반이 되어서도 공식 석상에서까지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과 훈계를 듣는다. 여성의 자궁이 마치 공공재이고 개인의 생식활동이 공적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1인 가구의 수가 역대 최대로 늘어났지만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다’라는 비난에 시달린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아이, 가족과 한 묶음으로 바라보는 밧줄 같은 시선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올가미처럼 따라다닐 것만 같다. 청년기와 중년기에 다짜고짜 ”자녀가 몇 살이냐?,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는데, 노년기에는 자연스러운 순서라도 되는 것처럼 “손주는 몇 살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려나.

비혼 여성이 출산하지 않은 이유는 각자의 사정마다 다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순전히 개인적 사정이므로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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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세상에는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러한 질문은 “질문자 입장에서는 정답이 하나뿐인” 닫힌 질문이고,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이다.

이 해로운 단언의 흔한 변주는 “자식을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여럿 두고도 어른이 되기는커녕 성숙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사례가 현실에 넘치도록 많아서, 나는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관계 맺을 줄 알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63-64p)

 

 

아이를 낳으려면 남녀가 필요한데 애 여성만 비난하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저출생의 주요 원인을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채 혼자 사는 여성의 증가에서 찾는 것은 진단이 잘못되었다. 예컨대 프랑스는 1인 가구 비율이 37.8%, 스웨덴은 45.4%(2020년 기준)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합계출산율도 프란스의 경우 1.8명, 스웨덴은 1.66명으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저출생 현상이 가속화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기록적인 저출생 현상의 구조적 원인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의 이기심과 페미니즘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과 가부장 문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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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제연구소는 출산율이 높은 선진국의 특징으로 남성의 적극적인 가사·육아 노동 참여, 워킹맘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 정부의 적극적 가족정책, 육아를 마친 남녀의 취업 문턱이 낮은 유연한 노동시장 등을 꼽았다.

특히 남성의 적극적 가사·육아 노동 참여가 관건이다.(72-73p)

 

 

병원이 보호자로 법적 가족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해서 법적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료법에는 병원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수술 동의서나 입원 동의서에 관한 세부 규정이 없다. 응급 상황에도 항상 법정대리인이나 보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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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직계가족인 보호자를 찾고 동의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의료사고가 나거나 수술비를 청구할 때 분쟁이 날 것에 대한 병원 측의 우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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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과도한 ‘보호자 찾기’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환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의료현장의 편의성’중심 사고”라고 짚었다.

이 관행 때문에 1인 가구, 동성 커플 등 소위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사람은 실제 일상을 함께하는 이가 실질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 보고서는 “이는 단순히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조건이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하는”현실을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96-97p)

 

 

서로의 꼴을 봐주는 것. 서로 신세 지는 것을 받아 주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혼자서 오래 살아온 솔로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마음이다. 예컨대 나는 남에게 폐 끼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부탁하는 게 어렵고 싫어서 어지간한 일은 혼자 해결하는 데에 이골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폐를 입히는 상황이나 부탁해 오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조차 꺼린다는 사실을. 이야말로 ‘인색한 사람’의 정의가 아닌가. 나는 스스로 나와 타인 사이에 넓은 거리가 필요한 성향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도 모르게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 영감’을 닮아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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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폐 끼치고 다른 사람이 내게 기댈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건 정말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는 주얼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마을도 “특히나 1인 가구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못하는 말이 ‘도와줘’라는 말”이람 거들었다.(168-169p)

 

 

혼자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면 비비 구성원들의 말마따나 “서로 꼴을 봐주고”, “폐 끼침을 주고받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꼭 연습해야 한다고, 비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노후 계획 1번으로 마음에 새긴 일이다.(171p)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들은 비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안정성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현실의 불안,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하는 시야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도 소득 또는 일자리보다 주거 안정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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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살다 보니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남한테 손 벌리지 않고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그걸 보장해 준 게 집이었어요.(196-197p)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셨습니다.

 

선배의 사무치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묘한 반발심이 싹텄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면,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 손으로 배변과 배뇨를 처리할 수 없게 되면 존엄을 잃는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그 말에 배어 있는 듯해서였다.

선배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존엄이 훼손된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이 생리 현상과 위생에 좌우되는, 그렇게 하찮은 가치인가?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이미 상당히 많은 중증환자, 노인, 장애인들이 배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에서는 존엄이 다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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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치매에 대한 공포의 대안으로 안락사를 제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없는 생명을 구별하는 생각이 깔려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생 사상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우생 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발병 이후 ‘기-승-전-스위스’를 들먹여 오던 것에 대해 살짝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안락사를 원한다고 거침없이 말해온 내 마음속에서는 인지증이나 다른 질병 등으로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각이 들어서였다.(232-234p)

 

 

아버지를 보며 에이징 소로인 내가 느끼는 또 하나의 암담함은 “‘나 같은 딸’이 없는 나는 자중에 어떻게 하나”같은 걱정이었다.

노화로 인지기능을 잃게 된다면 길게 와병하고 삶을 마무리할 때, 누가 나 대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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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간병하다 보니 이 상태면 어떤 치료가 필요하고, 어디를 가야 하고, 간병인은 어디서 구하고 등등 처리해야 할 사무적 절차가 많다는 걸 절감했어요. 그 일이 주는 피로도도 상당하고요. 내가 나이 들었을 때 친구들과 서로 의지해 산다고 해도 이건 친구가 맡아서 처리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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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도 돈 말고 필요한 노후 준비로 “인생 막바지에 나를 대리해 줄 사람”을 꼽았다.

 

“대개 자녀가 그 역할을 할 텐데, 전 자식이 없기도 하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자식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차라리 그런 일을 해주는 대리인에게 합당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맡길 수 있으면 좋겠고, 자식한테는 안 시키고 싶어요. 내가 정신이 멀쩡할 때 그런 일을 위임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해지면 좋겠어요.”(238-239p)

 

 

1인 가구와 다인 가구의 세율 격차보다 되레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인 가구의 각종 공제 항목이 법적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함께 살면서 혈연가족보다 더 긴밀하게 서로를 부양하며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비혼 동거 가구나 생활공동체는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280p)

 

 

어딜 가도 사람들이 모두 당연하다는 듯 중년 여성을 “사모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타인의 정의 중 한 예일 것이다. 중년 여성은 거의 늘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엄마처럼 관계적 호칭으로 불린다. 그 관계가 없는 여성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말이다.(284p)

 

 

현행법에는 유언과 관계없이 유족이 일정한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정해둔 유류분제도가 있다. 부모를 여의고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솔로가 함께 살던 친구에게 재산을 주겠다고 유언을 남겨도 형제자매가 권리를 주장하면 유류분제도에 따라 3분의 1을 줘야 한다.

정부는 이 조항이 1인 가구가 늘고 형제자매가 각자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고, 유류분 조항에서 형제자매를 삭제하는 민법개정안을 2022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민법 개정안에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도 친양자를 입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었다. 이 글을 쓰는 2023년 1월 현재 해당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이 개정안이 확정되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변화의 필요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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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등에 관한 법률은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순서를 정해두었는데, 배우자·자녀·부모·형제자매 등 법적 가족에 집중되어 있어서 혈연관계와 법적 관계를 서류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무연고 장례를 지원해 온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등이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보건복지부는 2020년 지침을 수정했다. 사실혼 관계, 친구, 지역공동체 등 삶의 동반자였던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 것이다. 2022년에는 제삼자가 가족 대신 장례를 치르려 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심의를 거치게 했던 규정도 삭제했다. 이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조카·며느리 같은 친족, 장기간 혹은 지속적으로 동거·부양·돌봄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선된 방침이 법 개정이 아니라 행정부 지침 변경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289-290p)

 

 

협소하게 정의된 가족의 중요도가 커질수록, 가족의 역할이 확대될수록 가족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도 꺾이기 마련이다. 원가족의 풍부한 지원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가족이 사회보장과 복지의 기본 단위인 한, 이미 부유한 가족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가족은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다.

가족이 짊어진 짐을 덜어내고 사회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자 김진석은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 현재의 ‘국가-가족-개인’ 복지국가에서 중간의 ‘가족’을 뺀 ‘국가-개인’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국가-가족-개인 모델은 가족-개인 사이에 부양과 돌봄이라는 가족 기능을 전제하고, 그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에만 국가가 보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가-개인 모델은 개인의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가족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다.(311-312p)

 

 

고백하자면 ‘홀로이면서 함께’는 내가 오래 붙들고 있는 인생의 화두다. 온전히 ‘홀로’도 아니고 늘 ‘함께’도 아닌, ‘홀로이면서 함께’하기. 단독자로서의 영역을 지키면서 연결의 감각을 잃지 않기. 나는 삶을 꾸리고 관계를 맺을 때 늘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방향키와도 같다.(316p)

 

 

 

ㅡ 김희경, <에이징 솔로> 中,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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