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8

 

 

책 제목만 봐서는 읽기는커녕 집어들 생각조차 안했을테지만 추천사에 낚여 읽어봤다. 제목에 저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지만 아마도 이 책은 저자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땠냐고? 책 제목에 걸맞은 감성 넘치는 일기장 같은 글이었다.

 

 

 

매일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며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해놓고 이렇게 말하려니 민망하지만 사실 진짜 여행에는 별 흥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어떻게든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데,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세계테마기행> ‘오! 멋진 데이’를 보며 “오! 멋진데~” 감탄하는 것까지가 딱 즐겁다.(30-31p)

 

 

그러니까 그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아프게, 슬프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도 서로의 곁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 좋든 싫든 아직은 남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주고 받은 실망을 투명하게 드러내선 안 되는 사람들.

그들의 가장 별로인 부분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뻔뻔해지지도 용감해지지도 못하고 당황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숱한 실망감과 참담함을 안겨주었을 텐데. 그 서글픈 순간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왔을까? 하지만 정말로 물어볼 용기는 없다. 우리는 아직 아주 많은 날을 우리로 살아야 하니까. 그 사실이 가끔은 막막하다. 그런 날이면 모르는 사람들이 간절히 그리워진다.(50-51p)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치매라는 건 젊은 시절 어떤 공포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병인 것 같았다. 싸구려 인조가죽이 벗겨져 군데군데 노란 스펀지가 드러난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최고로 용감해서 무서운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혹시 내가 언젠가 치매를 앓게 됐을 때 치과나 벌레, 가난,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 같은 것들에 대해 끝없이 떠들까 봐 두려웠다. 만날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사람에게 매번 성실하게 반응해주는 것은 웬만한 애정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노인이 되었을 때 그렇게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확실히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랑은 독과점을 전제로 하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법인데 나는 그런 류의 관계맺음에 무능하고 게으르니까.(127-128p)

 

 

 

ㅡ 하현,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中, 비에이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