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

 

작년과 올해에 등단한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었다. 공현진과 김기태는 추후에 단편집이 나오면 읽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에게 칭찬은 아닌 듯 하나 김기태 작가는 작품보다 인터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힘을 빼야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다 빼면 안 되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희주는 잘못된 답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힘을 빼는 거면 빼는 거고, 주는 거면 주는 거지. 그게 바로 균형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남들은 어떻게 이런 균형을 어렵지 않게 잡을까. 희주는 너무 몸에 힘을 주지 않아서 혼이 났다가, 곧바로 너무 많은 힘을 주어서 물속으로 가라 앉았다.(23p)

 

 

강사는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희주와 주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화를 쏟아내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주호가 뒤돌아서 강사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물이 갈라졌다.

“뭐가요. 씨발. 왜 어쩌라고?”

강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호에게 욕을 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희주도 긴장했다. 주호는 강사의 빨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강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희주도 당황했다.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야 저런 말이 나올까. 대화 맥락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주호와 나눴던 대화가 아닌 대화들이 떠올랐다.

침묵.(35-36p)

 

 

리아는 마음이 넉넉하고 편견이 없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며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맹희를 데려갔다. 부모의 집에 살아도 자기 방 인테리어는 자기 취향을 고수한다는 스물두 살짜리 애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다움을 지켜야죠. 삶이란 어차피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틀린 말도 아니지만 걔랑 친구가 될 순 없었다. 그 취향. 너다움. 도무지 못생긴 빨래 건조대를 방 바깥에 둘 수 있어서 유지되는 거 아닐까. 이런, 내가 마음이 좁고 편견이 있네. 온화한 피아노곡을 틀어놓고 코튼향 인세스를 피운다고 6인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적당히 마모시킨 자기 고백을 주고받다 집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맹희는 양배추즙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맥주 캔을 땄다. ‘늦은 밤 혼자·····’ 어쩌구로 제목을 붙인 플레이 리스트를 유튜브에서 골라 틀고 몇 곡을 스킵하다가 꺼버렸다. 요새 노래들은 매가리가 없어. 아니, 매가리가 없는 건 아닌가.

“너 조맹희. 네가 원하는 게 뭐니.”

(...)

“아 근데. 나는 사랑이 좀 하고 싶다.”(67-69p)

 

 

문화 자본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표현 양식의 세련됨이나 고유함’으로 ‘감정의 진실함’을 가늠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감정사회학자인 에바 일루즈의 저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학사, 2014)에서 이런 맥락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 보다>를 찾아 읽는 분들의 취향은 어떨까요. 지중해 양식을 모방한 펜션에서 하트 모양으로 초를 늘어놓고 「다행이다」를 부르는 프러포즈 어떤가요? 제 취향은 아니에요. 5성급 호텔 방에 샤넬과 카르티에를 포토제닉하게 전시하는 프러포즈는요? 그럴 돈도 없지만 이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감정 표현(의 양식)이 세련되면서 고유해야 하는데, 또 그런 열망이 도드라지면 안 되고, 약간은 소박한····· ‘꾸안꾸 스타일’ 같은 걸 원하게 됩니다. 어렵습니다. 복잡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삼각형인지 반원형인지 따져서 딱 들어맞는 섬세하고 유니크한 양식을 고릅니다. 하지만 저는 통속적인 유행가에 기대고 속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양식미를 따질 시간에 그냥 사랑을 해버리는 사람,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특별함을 좇는 사람이요. 이국의 골목이나 비 오는 도서관에서 만나야만 멋진 건 아닐거예요. 맞선에서, <솔로농장>에서, 인터넷 카페 ‘중랑구 3040 늑대와 여우 모여라’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108-109p)

 

 

굳이 나의 제한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자폭해야 할까. 소설을 탈고해서 발표할 때까지, 인터뷰지를 쓰는 지금도 걱정이 큽니다. 하지만 잘 알고 살아본 것만, 당사자성이 있는 것만 쓰는 게 답일까요. 반성의 결과가 마비라면 개인만 남을지도요. 오해와 착각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말을 걸어보는 건 유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풀만 뜯으면 평화로울 수 있지만 저는 그게 목장주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의심이 들거든요.(111p)

 

 

살면서 모든 언행마다 윤리적인 무게를 고려해 신중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뒷조사를 하거나 댓글을 남기는 건 꽤 수고스러운 일 같거든요. 굳이 출연자의 개인 계정을 찾아내 직접 메시지를 보내서 비난하기도 하고요. 사랑도 아니고 혐오를 동력으로 그런 일을 집요하게 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말초적이고 휘발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면 그렇게까지 정성스러울 수 없을 거예요. 진심으로 믿고 주장하고 싶은 세계관이 있어 보여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증인이 되면서 믿음이 강화되겠지요. ‘바깥’의 인간들은 호시탐탐 자기들을 속이고 권리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무엇이 되고요. 그런 편견 어린 댓글이 2백 개 있으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제발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라”라고 남기기도 해요. 시원한 댓글이지요. 하지만 어디로 나가야 할까요. 삼대가 앉는 식탁, 마을 슈퍼마켓 앞 평상, 하다못해 동네 선배들이랑 인사하는 오락실····· 이제 그런 건 없어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지만, 우리는 낯선 이들과 접촉하며 자기 세계관을 교정하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구하는 광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기존의 광장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기능하기도 했으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도 온전히 가진 적 없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광장을 지향하는 태도라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215-216p)

 

 

 

ㅡ 공현진, 김기태, 하가람, <소설 보다: 여름 2023>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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