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7

 

한국의 모든 문학과 작가를 싸잡고 싶진 않지만 요즘 젊은 작가 대부분이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음에도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작품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작가들 자신의 진보적인(?) 생각을 펼쳐 놓기만 하니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이 단편집은 거의 모든 소설이 비슷비슷한 소재로 애매하게ㅡ여운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ㅡ마무리하는 소설집이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한 어떤 생각을 담은 ‘첫사랑’은 내 나이엔 너무 낭만적이고 낯간지러운지라 아쉬웠으나 아직 읽어보지 않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구의 증명에 그런 면이 집대성되어 그렇게 젊은 층에 이례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물론 읽을 생각은 없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미묘하고도 내밀한 어떤 것을 잡아채서 언어로 풀어내는 게 작가의 역할일 수도 있겠지만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궁금하니 그것까지는 읽어봐야지.

 

 

 

 

어떤 첫사랑은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악몽이지만 어떤 첫사랑은 가장 이르게 빛나는 샛별처럼 그곳에서 인생보다 더 긴 시간 반짝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 가능하다고 신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지 이론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행성들 고유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여전한 것처럼.

우현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레서가 아니다. 진심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런 표정이 나온다.(100p)

 

10대 사춘기 시절에 이런 문장을 읽었다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을까? 그럴 리가.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마음껏 왜곡한 점이 특히 좋다고, 왜곡하고 조각냈는데도 한눈에 자기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정성을 다했다는 게 느껴져. 애정 같은 거.

혜지가 그림을 돌돌 말면서 말했다.

난 이런 게 진심이라고 생각해. 좋아한다는 말이나 뭐 그런 것보다, 이런 게.(106p)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닌가?

글쎄, 태어난 순간에는 그렇겠지. 근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무중력 우주에서 약한 힘을 받은 것처럼. 태어나는 순간 그 힘을 받아서, 만나자마자 멀어지는 거야. 서로의 한쪽만을 보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거지.

······쓸쓸한 말이네.

그래도 난 너와 같이 살고 싶어.

멀어지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137p)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 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164p)

 

 

돌아보니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 떠난 사람만 다섯 명이다. 그들 모두 마지막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흡사했다. 무언가에 상당히 질린 표정들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저절로 그 표정이 지어졌다. 마침내 나도 내게 질려 버렸다. 살면서 무언가에 질린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나였다. 나는 금방 사랑하고 말 잘 듣다가 결국에는 질리는 인간이었다. 질린다는 느낌은 싫증이나 미움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악이었다. 나에게 질려 버리자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 몸, 내 목소리, 나의 일, 나의 습관, 나의 생활, 그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176-177p)

 

질리다라는 단어는 조금 더 생각해기로.

 

 

그는 내 말을 무척 잘 들어 주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어떤 부분을 마모시키는 것 같았다. 설렘과 호기심의 영토에 익숙함과 권태가 조금씩 스며들던 때였다. 그 사람이 많은 빚을 지게 됐다. 평생 갚아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럴듯한 위로를 건네고 도망쳤다. 이성적, 객관적으로는 나를 나쁘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관적, 감정적으로 나는 나빴다. ‘너와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로 시작되었던 관계가 ‘너와 있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싫어.’라는 말로 끝났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도 내 아픔을 그의 아픔보다 부풀리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을 그런 것에 써먹었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민거리나 좌절할 일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C에게 말하고 싶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행위 자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너의 말을 끊거나 부정하지 않고 듣고 있는 그 사람 자체라고. 거기 빤히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지 말고 원래 없는 것을 없다고 시비 걸지 말고, 더는 너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라고. 그랬어야 했다. 네 곁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같잖은 포즈로 나를 꾸미는 대신,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대신 가감 없이 말하고 보여 줘야 했다. 내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만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알았고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안다는 것을 나만 몰랐을 뿐이다.(288-289p)

 

 

 

 

ㅡ 최진영, <겨울방학>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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