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7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30608/119682722/1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허준이는 자극을 피하고자 몇 달째 같은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라서 링크를 남겨준다.

읽기 전에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잘했다. 다만 각종 사례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후반부는 너무 처지고 일반화가 심하다. 이 책을 읽기 전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불교는 왜 진실인가’가 이 책의 상위호환(?)이라고 해서 일단 이것도 빌려두긴 했음.

 

 

 

 

유아기의 경험이 오랫동안 잊히거나 의식적인 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평생 심리적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정신 분석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아기의 트라우마가 성인의 정신병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은, 모든 도전적인 경험이 우리를 심리치료용 소파로 데려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질됐다.

 

생각해 볼 만한 말인 것 같다. 결국은 정도의 문제겠지만 그 정도란 건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그걸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는 일이라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양육과 교육 과정에서 발달심리학과 공감이 강조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성취도와 별개로 인정하고, 학교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신체적·정신적 야만 행위를 삼가며, 사고하고 배우며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완충재를 가득 채운 독방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를 너무 질병처럼 대하고 과하게 관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러면 아이들은 상처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처할 방법도 모르게 된다.

 

 

하지만 저울에 관한 중요한 속성이 하나 있다. 저울은 수평 상태, 즉 평형equilibrium을 유지하려고 한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울이 쾌락 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저울을 다시 수평 상태로 돌리려는 강력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self-regulating mechanism이 작동한다. 이러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은 의식적 사고나 별도의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반사 작용처럼 균형을 잡으려 한다.

 

 

1970년대에 사회과학자 리처드 솔로몬Richard Solomon과 존 코빗John Corbit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의 상호 관계를 대립-과정 이론opponent-process theory이라고 칭했다. “쾌락적 혹은 정서적 중립으로부터 오랫동안 혹은 반복해서 벗어나면 …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그 대가란 자극과 반대되는 가치를 갖는 이후 반응after-reaction이다. 그러니까 옛말처럼 올라가는 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쾌락 자극에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반복해서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 편향은 갈수록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이후 반응, 즉 고통 쪽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갈수록 강하고 길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신경 적응neuroadaptation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그렘린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지고 많아지며, 우리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앞서 선택한 쾌락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은 앞서 상당한 절제 기간을 거친 사람들도 다시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그저 평범한 기분(수평 상태)을 느끼려 해도 중독 대상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조지 쿱George Koob은 이러한 현상을 “불쾌감에 따른 재발dysphoria driven relapse”이라고 표현한다. 중독 대상에 과거와 같이 다시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금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상담을 하면서 나는 심각한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의존을 멈추고도 단 한 번의 노출로 다시 강박적인 의존에 빠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추구자다.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는 세상의 시험에 너무나 잘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지나치게 풍족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만성적인 좌식 식사 환경에서의 당뇨병을 연구한 톰 피누케인Tom Finucane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은 열대우림의 선인장입니다”라고 말했다. 건조기후에 살아가는 선인장이 열대우림에 던져진 것처럼 우리는 과도한 도파민에 둘러싸인 환경에 살고 있다.

 

 

둘째, 젊은 사람들은 심각한 중독자라 해도 의존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다. 어느 고등학교 선생이 내게 얘기한 것처럼 “정말 뛰어난 학생이라도 매일 대마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만성적 의존에 따른 의도치 않은 결과는 늘어난다.

 

 

마음챙김은 절제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중 다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도의 도파민 물질과 행동에 기댄다. 그러나 중독 대상에서 탈피하려고 도파민 사용을 멈추면 처음엔 고통스러운 생각, 감정, 감각 들이 몰려든다. 이때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이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마음챙김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경험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다채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계속 그 자리에 있지만 다양하게 변화하고, 결국 자기만의 고통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모두의 고통을 대승적으로 아우르게 한다.

 

 

내 환자 중 중독 대상을 스스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이들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고 얘기했다. 결국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중독 대상과의 이별을 택했다. 하지만 음식에 중독된 환자들은 어떨까? 아니면 스마트폰? 완전히 끊을 수 없는 중독 대상이라면?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점차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자기 구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물리적 전략(공간), 순차적 전략(시간), 범주적 전략(의미). 그러나 자기 구속은 완벽한 안전장치가 아니다. 심각한 중독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자기 구속 역시 자기기만, 불신, 엉터리 과학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범주적 자기 구속은 도파민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 사용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위 유형, 그리고 허락하지 않는 하위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중독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갈구하게 만드는 계기도 금지하는 방식이다.

 

 

수년 동안 만난 다양한 환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향정신성 약물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단기적으로 완화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 자체를 제한한다. 비탄과 경외심 같은 강렬한 감정을 특히 무디게 한다. 어떤 환자는 항우울제 덕분에 조울증의 고통에서 해방됐다고 기뻐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올림픽 광고를 보고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격 중 감성적인 부분을 기꺼이 희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 수 없자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 처방에 따라 그녀는 항우울제를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우울과 불안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폭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녀는 바닥에 가까운 감정도 인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약물 치료는 구명 도구가 될 수 있고, 나 또한 약물을 환자 치료에 활용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인간의 온갖 고통을 약물로 없애려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함께 보겠지만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 바로 고통 받아들이기다.

 

 

고통이 우리가 쾌락에 지불하는 대가인 것처럼, 쾌락 역시 우리가 고통을 통해 얻는 보상이다.

 

우리의 뇌는 쾌락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내성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뇌는 고통 쪽에 내성을 갖게 된다. 스카이다이버들을 대조군(뱃사공들)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스카이다이빙을 반복적으로 즐긴 이들이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무쾌감증을 경험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낼 때 특히 그렇다. 이는 반직관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떠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성격적 결함이나 일탈 행위를 알면 거리를 둔다는 게 논리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솔직할수록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당신의 엉망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됨됨이를 돌아보고 의심, 두려움, 나약함이 자신만의 약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한 번에 몇 주 동안 술을 안 드실 수 있는데, 술을 드시기만 하면 안 좋죠

 

내 얘기 하는 것 같아서 좀 찔림.

 

 

 

일반적으로 종교 단체나 사회적 집단이 여러모로 관대하고 규칙과 제한이 적을수록 더 많은 추종자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 엄격한 교회들’이 무임 승차자를 걸러내고 더 탄탄한 집단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단체들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안착할 확률도 더 높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친밀감을 만드는 방법은 완벽함이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는 데 다 같이 노력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친밀감을 높인다.

 

 

 

 

ㅡ 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中, 흐름출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