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8

 

장편은 7년 만에 읽는 듯.

 

 

 

“뭐가 있었냐고? 아아, 그걸 설명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나.”

(...)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102p)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주위에는 내 생활이 자유롭고 속 편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그 자유를, 일상의 평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유의 삶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고요하고, 무엇보다 고독했으므로.(193-194p)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p)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681p)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751-75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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