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4

 

하루키 신간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해서 옛날 작품 중 한 권과 비교하며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봤다. 데미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감상과 비슷한 느낌이 이 책에 들었다. 어떤 책은 특정한 시기에 읽는 것이, 아니, 오직 특정 시기의 독서에서‘만’ 영향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공포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기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변명과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언영색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만약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라 해도)보류하고 싶어진다.(79p)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161-162p)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항이 거의 같은 비율로 감추어져 있으니까.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여기에서의 이야기지만)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작은 방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사실 샴쌍둥이처럼 숙명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혼돈으로서 존재한다. 혼돈, 혼돈.

대체 누가 바다와, 바다가 반영시키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비와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18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中, 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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