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숨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p)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날씨는 경제이기도 한데, 농업과 어업 같은 1차 산업은 물론, 물류의 흐름과 인력의 출퇴근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실은 차별 없음과 거리가 멀다. 날씨가 몰고 오는 위험함과 불쾌함은 일정 부분 값비싼 주거 환경이나 적절한 냉난방 시설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씨로 인해 가장 먼저 취약해지는 건 약자들이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노인.(77p)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은, 폭염 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89p)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94p)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소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120-121p)

 

 

그런데 취재에 응하는 미화원들의 표정이 좀 떨떠름해 보였다. 지하에 휴게실이 있었을 때가 낫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화원들이 쉬는 모습이 지상으로 나와 ‘눈에 띄게’되자 입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123p)

 

 

강자들의 선행만큼은 아니겠지만, 약자들의 선행은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한다. 물론 약자들의 선행이 과다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다만 약자들이 선행이 뉴스가 될 때는, 이들이 약자라는 부분에 뉴스 가치가 실린다. 약자라는 점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동체의 도덕심을 환기하는 역할까지 약자들에게 과다 부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온다. 연말이면 자기 재산을 다 기부하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이런 뉴스들에는 “아직 회망이 있다”, “사람 사는 사회다”, “따스한 온전을 느꼈다”는 반응들이 따라오곤 한다.

이들이 겪는 ‘불우함’, 그걸 견뎌낸 ‘근면함’과 ‘베푸는 마음’이 순차적으로 조명될 때, 이런 뉴스들은 누구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까? 뉴스 매체의 메시지 주입 능력을 과신하는 건 아니지만, 혹여 이런 뉴스가 약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행동의 폭을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132p)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136p)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148p)

 

 

 

ㅡ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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