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8

 

 

 

“조사관님은 대통령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람이 자기 주변의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내가 만약 태양광발전 사업자라면,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라는 작물을 키우는 농부라면 하늘이 흐린지 아닌지 정확히 알아야 할거예요. 하지만 그저 산책을 즐기는 행인이라면 밖에 나가 있는동안 비가 올지 안 올지만 알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흐리면 기분이 가라앉죠. 우리가 그런 동물이니까. 그렇게 진화한터라. 그럴 때 하늘을 파란색으로 보이게 해주는 색안경을 쓰면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그런 색안경을 쓰면 안 될 이유가 뭐죠? 색안경이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다고?”(22p)

 

 

그러나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수정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 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 몰래 물에 타놓은 그 약을 모르고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84-85p)

 

 

「뉴요커」에 원고를 보내는 순간까지 내가 체험 기계의 의미를 파악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아마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기계가 인류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버드대 철학과 폴 레비나스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레비나스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타자화와 배제는 인간존재와 인간적 사유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성은 숭고하고 근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거기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거듭되는 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픽션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윤리는 모두 그런 타자화와 배제를 통해 발전돼왔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마, 성폭력범, 아동 학대범들에게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을 굳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닮은 존재여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다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때로 인간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게 레비나스 교수의 관점이다. 레비나스 교수는 하버드대 신문에 발표한 특별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171p)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자란 식용식물을 채취해서 먹는다면? 그리고 배양육은? 여기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술에 몹시 취했거나 깊이 잠든 사람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성폭행하는 일은 나쁜가? 청각장애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시각장애인의 얼굴 앞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일은 나쁜가? 신경계가 다 자라지 않은 태아를 총름파나 방사선으로 원거리에서 조각조각내는 일은 나쁜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즉, 내가 묻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내가 어떤 도덕적 명령을 지키고자 할 때 그 대상이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가 과연 중요한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고, 내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도덕적 명령은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식물 역시 생명이므로 나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 않다. 동물의 알을 먹지 않는 것처럼 곡물이나 씨앗을 먹는 일도 피하고 싶다.(187p)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측이나 분석이 아니라 행동이다. 언제나. 그날 마콘도의 주방에서 그 단순한 진실을 알았던 사람은 송유진이 아니라 대리였다. 그녀는 송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눈을 감은 채 송유진에게 다가갔다.(380p)

 

 

ㅡ 장강명,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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