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4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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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이나 멸시라는 건 너무 멀리 동떨어진 것에는 던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종이책에서 느끼는 증오도 그렇다. 운동 능력이 없는 내 몸이 아무리 소외를 당하더라도 공원 철봉이나 정글짐에 증오감을 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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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서서히 등뼈가 찌부러지는 것만 같은데도, ‘종이 냄새가 좋다,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좋다’라는 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전자서적을 깎아내리는 비장애인은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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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치비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37-46p)

 

 

 

ㅡ 이치카와 사오, <헌치백> 中,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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