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7

 

 

 

내 트위터는 끔찍했다. 물론 트위터 전반이 끔찍하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14년 후반부에 누군가 트위터에 있는 모든 걸 끔찍하게 만드는 버그를 풀어버린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트위터 덕분에 많이 웃었는데’하고 한탄했다. 더 이상 트위터로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트위터에는 웃기고 흥미로운 트윗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지루하고 끔찍한 헛소리밖에 없었다.

(...)

예민하고도 뚱했던 10대 시절 내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트위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트위터가 특별하고 또 선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다. 트위터는 기생충 같은 떠버리들로 바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해체하고 불평하고 화내고...(24-25p)

 

 

삶은 현재형 시제로 살면서 미래를 곁눈질하는 동시에 과거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음에도 일인칭 시점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문학과 삶의 핵심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가 평소 자신의 고뇌 어린 일인칭 시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인칭 의식에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삶의 일인칭 시선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의심과 결단을 반복하는 실질적 일인칭 의식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라는 다른 일인칭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만약 삶에서의 일인칭 시점을 특징짓는 요소가 고뇌이며 그것이 일인칭 소설을 읽을 때 제거되고 만다면,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문학에서 일인칭이란 근본적으로는 삼인칭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소설의 두 버전은 서로 같다고 말이다.(103p)

 

 

나는 늘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나란히 진행하거나, 혹은 그 둘이 우연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불가해한 경험을 한 뒤 최선을 다해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 경험을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듯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가 결코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총체적으로 행동하는데ㅡ그중 오직 일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이다ㅡ, 이때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했다.(108p)

 

 

 

ㅡ 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中, 어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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