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10

 

 

근자에 읽은 어떤 책보다 공감되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 후로 P2P의 시대가 저물고, 토렌트의 시대가 도래하고, 모종의 사건으로 웹하드들이 몰락하고, 또 여러 가지 굿 다운로드 운동과 함께 한국의 수많은 토렌트들이 몰락하고, 또 여러 가지 굿 다운로드 운동과 함께 한국의 수많은 토렌트 사이트들이 단속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이용했다. 어떤 어둠의 경로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비용을 지불해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구매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처럼 토렌트에서 영화와 드라마들을 내려받고, 웹하드에서는 게임과 예능을 다운받고, 포쉐어드와 소울식에서 음악들을 다운받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구태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까지만 해도 자신을 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해적이 되었는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해적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이 책에서는 그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7p)

 

 

하지만 내가 이 장에서 할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서비스도고 있는 상당수의 고전 영화들과 몇몇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경우에, 정품과 불법 복제판(리핑판)의 경계가 기실 희미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고전 영화를 구입해 재생했을 때 미국의 DVD/블루레이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로고가 뜨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대개 고전 영화의 리핑판 DVD가 그대로 2차 시장에 서비스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사실 공식적으로 서비스되는 영화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가 도둑질한 카피, 도둑질한 자막, 출처 미상의 복제된 소스롤 통해서 제공된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고전 영화를 접하게 되는 시네필들의 곤경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를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대개 빈곤한 이미지와 빈곤한 자막을 통해 영화를 접하게 될 뿐이다.(18p)

 

 

하지만 해적들의 도시 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플랫폼은 카라가르가일 것이다. 카라가르가는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초대장이 필요하며 회원제로 운영된다. 이러한 비공개 트래커들은 까다로운 가입 절차 때문에 아이피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저작권망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저작권 피난처로 사용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어떤 자료의 최초 배포는 비공개 트래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중간의 밀수꾼이나 도매상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최초 배포된 자료를 공개된 토렌트 사이트(대표적으로 최근에 폐쇄된 RARBG 같은 곳이 다)나, 앞서 말한 디스코드나 텔레그램, 또는 유튜브나 씨네스트, 웹하드 등으로 산포하는 것이 영화와 관련된 해적질 네트워크의 대략적인 구조이다. 카라가르가와 같은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들은 대부분 가입 시에 초대장이 필요하고, 사이트마다 지켜야 하는 규칙 같은 것들도 있다.(29p)

 

 

어떤 영화가 소실되는 것이 꼭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장 최근의 사례로, 2021년에 있었던 브라질 시네마테크의 화재 사건이나, 하라 마사토 감독의 저택에 난 화재로 인해 감독 본인만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필름들이 소실된 사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비물질적인 '파일'이 아닌 물질적인 대상인 '필름'에 대한 사례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대개 비물질적인 파일을 물질적인 대상(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에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디지털 파일들도 천재지변 하에서는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수집'<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에서 디지털 영상작품의 최선의 보존 전략을 산포(dissementation)라고 말한 바 있다. 가능한 많은 플랫폼에 영상 작품을 퍼뜨리고 각자의 저장 장치에 보관하도록 하는 것이 디지털 영상 작품에 대한 최선의 보전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37-38p)

 

 

일반적인 온라인 스크리닝은 다른 행사들처럼 짧게는 하루, 길면 한두 달 정도로 상영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한시적인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해적질-아카이브 충동의 큰 요잉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다. 중요해 보이는 어떤 작품의 온라인 상영이 발표되었을 때, 해적들의 심정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라는 강박이 아닌, '온라인으로 상영되었으니 추출해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영화제를 통해서 영화를 몇 편 감상 해 본 이들이라면 이런 한정된 관람 시간이 극장과 같은 편안한 구속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 안에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피로감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할 것이다. 시간제한의 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냐, 영화를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는 상태로 두고 그걸 보는 것은(어쩌면 영원히) 유예하느냐의 문제에서 해적들은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이러한 해적들의 아카이브 충동이 분명히 상호수동성의 상태를 강화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cf) 상호수동성이란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로베르트 팔러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물이나 기술이 우리를 대신해 '소비'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팔러가 예시로 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화를 녹화하면서 그 녹화 행위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고 막상 영화 자체는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녹화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영화를 본다고 느낀다. 외장하드나 클라우드에 영화를 수집하는 행위도 이런 상호수동적 행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영화를 보는 것을 반드시 무작정 유예하기만 할 것인지는 진정으로 따져 볼 문제다.(44p)

 

 

나는 그보다 어떠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시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항상 시네필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의 '생애 주기'가 존재하고, 그것이 아주 짧다고 생각했다. 2015년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여러 커뮤니티를 전전하며 인터넷에서 수많은 젊은 (자/타칭) 시네필들을 보았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그들의 상당수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마치 <배니싱>의 여주인공처럼. 아주 열성적으로 시네마테크까지 다니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아예 보지 않거나,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물론 가장 쉬운 설명은 그들이 '갓생'을 살러 갔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갓생'과 영화가 양립할 수 없다는 건 내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릴 적에 공장 노동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자주 빌려 왔고,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거실에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을 보곤 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 것과 달리 오즈나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일은 따로 어떤 열정을 요하는 일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나의 지인 중에 영화와 관련이 없는 공무원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뻘 시네필이 있어, 그에게 어떻게 영화를 계속해서 꾸준히 볼 수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진급을 포기하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농담이기도 했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실제로 많은 시네필들의 생애 주기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취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시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계속해서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많은 경우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다수가 사라진다.(당신이 이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부디 사라지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60-61p)

 

 

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막을 번역하고 또 그걸 무상으로 공유하고, 그 근간에 있는 멘탈리티는 무엇일까요?

 

음, 첫 번째로는 나 자신의 우울증 예방, 일종의 소일거리? 소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자막을 만들기 전까지 저는 주로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즐겼어요.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니까 집에서 음악을 듣는다든가 영화를 본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이 세 가지를 평생 했죠. 민수 님은 젊어서 모를 수도 있는데, 내 나이쯤 되면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가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 가지만 하고 있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남이 해 놓은 걸 즐기기만 하는 거니까요. 자막 번역은 달랐어요. 내가 하는 것, 내가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어떻게 말하면 일종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게 굉장한 보상이 돼요. 나 자신한테 보상이 커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남이 해 놓은 걸 5시간 보는 거랑, 내가 5시간 동안 뭔가를 만드는 거랑은 천지 차이예요. 그게 제일 큰 이유예요. 하루 종일 남이 해 놓은 것만 듣고 보고 읽고 있으면 쳐지거든요. 아무리 평생 해 온 것이지만 왠지 무기력하고, 남한테 도움 되는 일도 아니고요. 그런데 자막 작업은 남한테도 도움 되고 나한테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또 거기서도 보상이 오고요. 돈을 못 벌어도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해야죠. (웃음) 사람들이 못 보던 영화를 나 덕분에 봐서 너무 고맙다고, 내가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아니고, 첫 번째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100-101p)

 

 

물론 번역하신 모든 작품이 소중하시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정말 꼭 보시라' 추천하고 싶으신 베스트 10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백만 냥의 항아리(1935) / 야마나카 사다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960) / 이오시프 카이피츠

구름에 가린 별(1960) / 리트윅 가탁

카이샤스 항(1963) / 파울로 세자르 사라세니

사랑할 시간(1965) / 메틴 에륵센

경쟁자(1970) / 사티야지트 레이

바그너(1981) / 토니 팔머

모로메티 가족(1987) / 스테레 굴레아

집시의 시간(1988) / 에밀 쿠스트리차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2014) / 뤼디거 슈흐란트(102-103p)

 

 

한민수가 솔직한 어조로 고백하듯 해적질에는 법리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영화를 훔치는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법적인 권리에 귀속된다. 지금 한국에서 (십대에 한민수가 직접 유통한) 힙합 음악, 무협 소설, 애니메이션 등을 유통했다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한다. 그의 경험은 특수하거나 독특하지 않다. 해적질은 밀레니얼 세대라면 누구나 겪은 보편적 경험이다. 무턱대고 토렌트를 사용하는 바람에 송사에 휘말리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창작자도 불법 공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윈도우 OS, 음악 창작 프로그램, 영상 편집 프로그램 불법 다운로드 등, 우리가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도 불법 공유는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다.

법이 저작권을 보호한다 해도 그것이 온전히 창작자만을 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곧바로 귀속되지 않고, 기업에 의해 일부분 점유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불법 공유한 대부분의 이용자는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가 아니라, 저작권이 귀속되어 있는 영화사에 의해 고발당한다. 또한 영화의 성공으로 얻은 러닝 개런티는 주로 영화 투자자와 제자자, 주연배우, 영화감독에게 돌아간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성공의 과실을 누릴 수 없다.

(...)
하지만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서 이뤄지는 저작권 보호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픔 제작이라는 노동에 참여하는 이들보다도, 투자사와 배급사를 비롯한 기업에 더 많은 돈을 쥐어준다. 한민수나 나나, 저작권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무너트리자고 주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둑일기」는 영화를 소유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어 본다. 영화를 배급하는 기업, 영화 제작에 투자하는 기업의 이익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향유함으로써 창출되는 이익이다. 해적질은 영화 제작은 물론이고, 투자, 소비까지 영화제도 전반을 성찰하게 만든다. 창작자가 예술작품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유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저작권을 양도받은 기업? 한민수는 글 초두에서 인용한 "지적 재산권 같은 건 없다."라는 문구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그렇다면 시네필의 소유욕은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 어뗜 경험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영화적 경험을 완성하는 방법은 더 많은 파편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 동일한 영화를 봤을지라도 관객들은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 영화를 본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들이 서로를 반영하고 얽혀든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수와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 예전에 트위터에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카스탱 테일러 테일러의 <카니바>가 궁금증을 표현한 적 있다. <카니바>는 자신의 연인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은 살인마 '사가와 잇세이'(그는 20203년에 죽었다)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당시에 영화제 말고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성배'였다. 일면식도 없던 한민수는 트위터 쪽지로 중국어 자막이 달린 <카니바>의 다운로드 링크를 보내주었고 덕분에 나는 이 성배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한민수는 영화를 공유했고, 나는 영화를 관람했다. 우리는 하나의 영화로 서로 다른 기억들을 산포시켰다.(145-147p)

 

 

ㅡ 한민수, <영화도둑일기> 中,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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