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14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매일 끔찍한 뉴스를 접하면서 그걸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탓이리라. 아미의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시적인 태도가 가능했다. 그런 아미의 척수에 권정현지는 현실의 주삿바늘을 꽂아넣었다.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137p)
어느 날에는 아미가 집착하는 체외인 출생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동일하든 어머니가 동일하든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부모와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는데! 스스로가 자신을 단독자로 자각하면 되는 일이다. 현재의 자아와 삶에 만족한다면 부모를 따질 필요가 없다. 생물학적 부모는 스트레스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철멍은 가끔은 자신도 체외인이길 바랐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어둔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의무가 없고 자유로운 체외인이 부럽다고 생각했고 이런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체외인 혐오자나 뉴 휴머니스트들이 하는 말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두 극단적인 세력이 같은 이유로 체외인을 혐오하거나 애호한다는 사실이었다. 해방된 존재가 누군가에겐 공포였고 누군가에겐 축복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체외인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147p)
사람들은 행복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불행을 원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불행과 고통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사회가 반복해서 차별을 생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차별 없는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따라서 뉴 휴머니스트는 해방과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속박과 고통을 제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혁명 뒤에 공포 정치와 숙청이 뒤따르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대 이면에는 전 시대만큼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했고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됐다. 가족은 그중 가장 오래되고 힘이 센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존재할까?(152-153p)
ㅡ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中,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