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7
자라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예술을 감상하는 눈을 기른 사람은 '여유'가 있다. '감상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며, 아주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습득'을 통해 예술 감상 능력을 익힌 사람과 '늦게 시작되며 계통적이고 가속된 습득 형태'를 통해 같은 능력을 익힌 사람은 작품을 앞뒀을 때의 '여유'에서 차이가 생긴다.
(...)
'학력에 의한 문화귀족'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모른다"라는 고백이 그 사람이 '원래 속한 계층'을 폭로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한편 가정에서 문화자본을 신체화한 '혈통에 의한 문화귀족'은 태연하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눈은 한 번도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좋은지' '싫은지', '갖고 싶은지' '갖기 싫은지'라는 피부 감각 수준에서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처음 보는 작품에 대해 누군가 인상을 물어봐도, 연대나 유파나 기법이나 시장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참조하지 않고서 감각을 근거로 그 '좋고 나쁨'에 대해 "아, 이건 좋은데"라든지 "이런 건 필요 없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탁월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혈통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극 중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영화의 감독 이름을 기억한다. 전자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후자는 '지식'을 '경험'보다 우선한다. "작품 자체를 소홀히 보더라도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우선하며, 감각을 희생하더라도 훈련을 중시하는"것, 그것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의 '본색'이다.(22-24p)
문화자본을 획득하여 사회적 상승을 이루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제아무리 금욕적인 노력으로 교양이나 예의범절을 익혀 봤자, '노력해서 익혔다'는 점에서 그 문화자본에는 처음부터 '2류'라는 꼬리표가 붙고 만다.
이는 부조리하리만치 굴욕적인 경험이다.
그런 굴욕을 계속 맛봐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 그 불만을 해소할까. 이를 상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들은 문화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 혹은 노력했지만 자기네만큼은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깔봄'으로써 그 굴욕을 해소하려 할 것이다.
'타고난 귀족'은 '서민'을 깔보지 않는다(애초에 안중에 없으니까).
그러나 '벼락 귀족'은 '자기보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열중한다. '벼락같이 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 바로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벼락 문화귀족'은 반드시 부지런한 차별주의자가 된다. 온갖 영역에서 온갖 주제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차이를 발견하고 아무래도 좋은 뉘앙스의 차이를 열거하며 '문화자본을 그럭저럭 가진 자'와 '문화자본을 별로 가지지 못한 자'사이에 '뛰어넘기 힘든 경계선'을 긋고 싶어 하게 된다.(39-40p)
문화가 '자본'이 된다는 말을 들으면 눈치 빠른 작자는 "이크, 이제부터는 교양으로 승부해야지"라며 주판알을 튀긴다. "앞으로는 독서량이 출세의 열쇠가 된대"라고 들으면 <세계문학전집> 독파 계획을 세워서 쭉쭉 읽어나간다. 쭉쭉 읽어나가던 도중 그만 사드나 니체나 바타유 등을 읽기 시작하여 정신 차리고 보니 출세 같은 건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라는 역설은 문화자본주의만의 운치다.
문화자본으로의 접근은 '문화를 자본으로 이용하려 하는 발상 자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반드시 그리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애초에 '문화'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48p)
틀림없이 샐러리맨 대부분은 인사고과의 '불공평함'을 몹시 비난한다.
하지만 '인사고과가 엄정하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덕분에 자신의 시원찮은 업무 성과가 정당화된다는 점은 편하게 잊고 있다. 그는 인사고과가 불공평하며 신용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불이익과 동시에 이익도 얻지만, 그 부분은 홀랑 까먹고 있는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그대가 바라듯 인사고과가 실로 엄정하다면 어떻게 될지를. 나이도 가족구성도 근무연수도 학력도 무엇도 관계없이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월급과 직급이 결정되는 회사에서 근무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때 회사 내부의 모든 위계 차이와 월급 차이는 그대로 '공공연히 드러난 인간적 능력 차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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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고과가 적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그들은 전체적으로는 인사고과가 적정한 경우보다 더 큰 이익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고과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내 능력은 지금 평가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해'라는 달콤한 환상 속에 잠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내 능력은 적정하게 평가되지 않았으며 내 월급은 원래 받아야 할 액수보다 훨씬 적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적은 월급'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97-99p)
"올바른 결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단은 되도록 안 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뜻이니까요.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는 것, 이것이 '올바른 결단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112p)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결단'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과거에 한 행동이 청산되는 일이다.
이제껏 올바른 결단을 쌓아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망설일 만한 양자택일의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제껏 몇 번이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판단을 잘못해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재촉하는 갈림길이 자꾸만 나타난다.(124-125p)
연애로 '공통점 있는 유쾌한 파트너'를 얻었다면 그 뒤로는 즐겁게 놀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결혼은 그리 되지 않는다. 결혼이란 자신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평생 모르는 사이로 끝났을) '불쾌한 이웃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들의 취향이나 이해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연애와 결혼을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 완전히 다르다.
연애에 필요한 것은 '쾌락을 즐기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능력'인 반면 결혼에 필요한 것은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감소시키는 능력'이다.(141p)
결혼은 쾌락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144p)
결혼이란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고, 이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말을 하고,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이 사람과 서로 신체를 만질 수 있다'라는 역설적 상황을 살아내는 일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즐겁게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은 그런 것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이해도 공감도 안 되지만 여전히 인간은 타자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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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둘러 싸여 지내고 싶다"고 말할 작정인가. 그것은 사실 "나는 인간을 관두고 싶어"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당신의 메시지를 들어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가진 생물만이 당신의 말을 알아들어줄 테니까.(153-154p)
'리셋할 수 있다'는 것은 '최종 결단'이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다. '써 본 다음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했던 물건이었는지 아닌지를 깨닫는 일'이 허용된다는 것은, '써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곱씹어보지 않아도 좋다'는 태만함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만함이 허용될 때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집중력을 아끼게 된다.(157p)
나는 여기까지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미래에 대해 명확한 상상을 하는 사람은 그런 미래를 반드시 불러온다. 이것이 첫 번째 명제.
남녀 관계에서 상대가 하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해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두 번째 명제.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우리 중 누구도 연애의 종말을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는 상대의 어떤 행동을 보든 '아, 이제 끝이다'라고 믿는 데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믿음을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왠지 암담한 결론이 나와서 참으로 면목 없지만, 그렇게 낙담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은 이 리얼하거 쿨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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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잘 이해되지 않은 언동'에 손쉬운 해석을 적용하지 않는 일이다.(168-169p)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검색할 키워드를 사전에 알고 있는 정보'를 찾을 때는 유리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검색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의 쓸모없다.
그러나 고등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양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그런 게 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학술적 식견이나 스킬'과 느닷없이 마주치는 장소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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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라는 무의미하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그곳에 가면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자신이 그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과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캠퍼스를 어슬렁어슬렁 부유하다 보면 '뭔지 통 모르겠지만 굉장한 듯한 것'과 '하는 말에는 모순이 없지만 왠지 수상한 것'을 직감적으로 분별해내는 전지성적 능력이 차츰 몸에 배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대학 교육의 가장 큰 목표다.(188-189p)
상상력이란 '현실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힘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상상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그 프레임의 '바깥'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질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방한 공상을 즐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분방한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빈약함과 한계를 염려하는 일'이다.(203p)
'대중을 혐오하는' 감각이 대중적으로 공유되는 시대. 그것이 니체 이후의 대중사회다.
따라서 현대의 대중사회에서 "대중은 말이야·····"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말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필요하다. 주류를 비판하는 말 자체를 주류가 즐기는 시대에서 주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말(이를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말 그 자체)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을지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중요한 과제다.(207p)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는 나를 구석구석까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 언동에 공감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213p)
니체는 일찍이 "인간은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다"라고 설파했다. 현찰하신 대로,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답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종종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탓이다. 그래서 천재들은 해답이 불가능한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 때 일단 '이야기를 뒤집어본다'는 기법을 구사했다. 이를테면 데즈카 오사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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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도 데즈카는 같은 기법을 썼다. 「우주소년 아톰」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것'을 주인공으로 삼았듯,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정글의 생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듯(「밀림의 왕자 레오」), '섹스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성을 잃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듯(「인간들 모여라!」), '사는 것의 의미는?'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데즈카는 '죽는 것이 금지된 인간들'을 연작의 주인공으로 삼는 케이스 스터디를 시도했다. 「불새」라는 작품이다.(216-218p)
현상의 단면만을 보고 너무도 쉽게 타인을 재단하는 말들이 각 뉴스의 댓글을 장식한다. 유명인사의 과거 발언 한 마디에 그 사람을 매장할 기세로 덤벼들고, 식당이나 미용실 등의 조그만 실수를 빌미 삼아 가게를 폐점시킬 기세로 소란을 피운다. '맘충'이니 '한남충'이니 하는 혐오 단어는 너무도 널리 퍼져서 거의 절망적일 지경이다.
이들은 어쩌면 자신이 다수파라는 생각으로부터 정당성을 얻어 타인을 매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균적인 도덕심을 지닌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몇몇 대상이 특별하게 이상한 거니까. 세상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 보이니까. 이들은 결코 자신이 '소수파'에 속하는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 인용된 무라카미 류의 글에도 나와 있듯, "우리는 상황이 변하면 언제라도 비주류로 분류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다". 실제로는 상황이 변해야 할 것까지도 없다. 현대의 한 개인은 소수파 그룹과 다수파 그룹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고, 혐오 발언을 당하는 동시에 혐오 발언을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혐오의 시대가 도래한 듯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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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혐오는 대체로 몰이해와 무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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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상을 다각도로 알고 있을 때 그 대상은 '**충' 같은 차가운 기호로 표현될 수 없다. 어떤 대상의 일부분만을 취하여 매도하고 멸시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양이며 사고다. 십수 년 전에 출간된 우치다 타츠루의 글이 현재의 한국에서 여전히 시의성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242-243p)
ㅡ 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中, 서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