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3

 

 

이 책의 큰 골자는 인간 뇌의 예측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확신'이 형성되고, 그 '확신'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게 아님에도ㅡ뇌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ㅡ진화적으로 적응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남아 있다는 얘기를 진화 생물학을 기본으로 인지심리학 얘기 조금, 철학 얘기도 조금,  뇌과학 및 신경과학까지 엮어 만들었다. 이런 주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는데, 글쎄 종합선물세트가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지.

 

 

 

상황은 고착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의 확신을 의문시하고 캐묻는 대신 다른 확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흠, 정말 제 정신이 아니네'라며 폄하해버린다. 우리는 확신을 '정상적인 것'과 '제정신이 아닌 것', 합리와 비합리, 건강한 것과 병든 것으로 양분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구분을 한다. 이런 구분이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복잡성을 줄여주며, 구조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이렇게 구분하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어떤 근거와 정당성으로 이처럼 교집합이 없는 이분법적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확신을 단순히 '정상'과 '비정상'같은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게다가 이런 이분법은 위험하다. 건설적인 대화에 장애물이 되고, 사회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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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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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명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확신이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종종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견하게 해주고, 그런 사건에 더 쉽게 대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설은 가설일 따름이다. 즉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므로, 언제든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확신하고 싶어 하고, 확신을 고집스럽게 부여잡고 싶어 하는 경향은 심리학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확신은 가설에 불과하므로,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관점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18-20p)

 

 

우리는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세상을 지어내는 사람을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머릿속에서 말도 안되는 망상을 지어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믿거나 황당한 이야기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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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47p)

 

 

우리는 스스로 여러모로 굳게 확신하는 세계상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확신이 자신의 확신과 일치하면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한다.

심리 질환과 관련해서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을 한다.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가 종종 유동적임에도 말이다.(50p)

 

 

여러분은 우리의 세계상이 환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때는 현실과 더 많이 일치하고, 어느 때는 더 적게 일치하는 환상이다. 더 적게 일치할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유동적이다.(56p)

 

 

어떻게 해야 진실에 최소한 근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 세계가 제한돼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ㅡ가능한 한ㅡ어떤 이론이나 진술이 우리의 경험 세계와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론이나 진술이 지각, 즉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들어맞는가? 그런 경험이나 자료가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다. 우리의 이론이 증거에 부합하지 않으면, 이론을 그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철학에서는 이런 접근을 대응성 혹은 '진리 대응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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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각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현실은 고작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산물이기에 대응설은 맞지 않다. 우리의 경험 세계는 순수 주관적인 것이기에 이론이나 진술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리하여 이론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이론이 그 자체로 모순이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을 바로 정합설, 혹은 '진리 정합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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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대응설이 더 맞다고 볼지, 정합설이 더 맞다고 볼지 확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절대적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대응설이나 정합설처럼 어떤 이론을 판단하는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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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진술은 참이나 거짓, 어느 한쪽이 아니라 늘 '굉장히 있을 법하지 않은'에서 '굉장히 있을 법한'이라는 눈금 위에서 움직인다.(63-65p)

 

 

종교적 믿음은 선험적 확신을 요구한다. 확증이나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선험적으로ㅡ애초부터ㅡ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에게는 이런 특성이 확신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을 동반한다.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매우 바람직한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내게 도움이 되니까 믿는다'라는 진술을 종교적 믿음의 적절한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많은 신자에게 실용적 합리성을 인정해줄 수 있다. 신자들에게 인식적 합리성은 믿음이 주는 실용적 유익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진다. 삶에서 의지가 되고, 방향을 제시하고, 의미를 주는 것에 대한 필요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실에 대한 필요보다 크다. 이제 이런 데 비중을 두는 건 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선험적 확신으로 표방되는 신념은 위험과 부작용도 동반한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확신을 지닌 개개인이나 집단이 충돌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종교를 빌미로 일어난 전쟁 목록은 길며, 여기에 희생됐고 여전히 희생되는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78p)

 

 

음모론이 많은 사람아게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은 지각과 사고의 왜곡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모든 사건에서 원인 혹은 의도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한다. 우이는 순수한 우연이나 카오스를 참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일 더하기 일'을 하고,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단순한 설명을 좋아하고, 인과관계, 패턴을 찾아낸다. 심지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부분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권모술수나 어떤 힘을 찾아낸다. 우리는 이웃한 사건을 서로 연결한다. 그 사건들이 그냥 서로 우연히 가까이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의 사고는 이런 인지 왜곡에 취약해 종종 비합리적 판단에 이른다.

비합리적 확신의 모든 예는 인식적 비합리성이 결코 망상만의 특성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만연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적 믿음이나 미신처럼 인식적 합리성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확신이든, 이성의 옷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음모론이든, 인식적 비합리적 확신은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에 가깝다. 대부분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평범한'것들이다.(83p)

 

 

여기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망상적 사고와 '정상적' 사고가 우리 생각만큼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망상은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상적'사고 역시 우리 생각만큼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제정신이 아닌'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생각보다는 '더 제정신이 아닌'듯하다. 또는 최소한 소위 '정신 나간' 확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신이 헤까닥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96p)

 

 

진화론적인 설명은 종종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영어에 '그냥 고안한 이야기just so story'라는 개념이 있다. 그 이야기는 그럴듯하고 그 자체로 일관성이 있다. 그리하여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증거가 없고, 학문적 증거도 없다. 최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적 설명에 종종ㅡ때로는 정당하게ㅡ제기되는 비난이다. 복잡한 현상을 설명한느 것이나 특히 우리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해당하는 현상인 경우는 무엇보다 그러하다. 그래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하는 진화론적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그냥 고안한 이야기'다. 이는 이런 설명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많은 것은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제시된 명제를 학문적 증거로 뒷받침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제시하는 생각 중 다수는 아직 추측으로 남는다.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이 학문적 연구로 이어지고, 제기된 명제가 맞거나 틀리다는 증거가 나올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입증되거나 반증되거나 할 것이다. 어떤 영원히 사유로 남을 것이다.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처럼 근본적 이유에서 검증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관찰이 필요하거나 검증에 필요한 실험이 윤리적 원칙과 합치되지 않는 등 실제적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 할 것이다. 최소한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숙고하고 의미 있고 그럴듯하며, 나아가 도움이 되는 설명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 이론이 기존 지식에 근거하고, 앞으로의 경험적 검증에 열려 있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이론은 언제나 가설이므로,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반박될 가능성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이론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는 여기서 제안되는 아이디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113-114p)

 

 

조현병이나 망상 경햠도 그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 작은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고, 빠듯한 자원을 두고 적과 경쟁해야 했던 선조들에는 불신과 편집증적 경향이 생존에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더욱 조심하고 위험을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초자연적 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사회집단에서 명망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조현병의 특징으로 보는 정신병 증상은 원시사회에서는 저세상의 영이나 귀신과 접촉하는 것으로 해석됐을 것이고, 그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게 종종 사회적으로 특별한 샤먼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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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의 유전자 위험 변이가 한떄 적응적이었다는 생각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꽤 그럴듯하고 경험적으로 맞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이런 생각이 조현병의 진화론적 패러독스를 완전히 풀어주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능 손상을 동반한 심각한 정신 질환이 옛날에는 적으적일 수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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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의 진화적 패러독스 관점에서 그런 정신증이 규칙적 또는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원시사회 공동체에서 크게 유익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신증이 심하지 않거나 가벼운 환각 혹은 망상 증세가 샤먼 같은 특별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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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에서 자주 논의되는 특징은 창조성과 관련한 것으로 자연선택의 한 가지 유형인 성적 선택에 대한 다윈의 해묵은 생각과 통한다. 성적 선택에 따르면 많은 종이 아름다운 외모에 들이는 어마어마한 노력은 짝짓기 파트너에게 구애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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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조현병에 대한 유전적 리스크 변이가 살아남은 것은 그 변이가 창조성을 촉진하기 때문이었던 걸까? 이런 질문에 아직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다(결론을 내리는 데는 늘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발견으로 조현병의 진화론적 모순을 푸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심한 조현병의 경우는 다르지만, 유전적으로 가볍게 망상적 사고를 하는 경향은 10만 년 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자연선택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창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암시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신증 경향을 유발하는 유전적 위험 변이와 자연선택의 이점을 연결할 수 있는 요소가 창의성뿐만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혹시 있을 수 있는 위험, 특히 사회적 위협에 민감하도록 하는 것은 원시사회에서만 적응적 특질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다지 심하지 않다면 이런 특질은 자신과 가까운 유전적 친척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다.(117-125p)

 

 

요약하자면 신경정신과 의학자들은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연구 결과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증상의 심각성만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증상의 심각성만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말이다. 연구 결과들은 '정상적'확신과 '정신 나간' 확신이 생겨나는 토대가 되는 메커니즘, 즉 뇌 속 가정과 관련해 범주적 구분은 존재하지 않고 연속체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32p)

 

 

우선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까운 세계상을 만들 때 우리의 적합성에 이로울 거라는 건 자명하다. 로봇이 주변 세계를 되도록 현실적으로 파악할 때 성공적으로 주변 세계를 누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합리성은 그 자체로는 자연선택에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비이성적 행동이 더 많은 섹스파트너를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행동도 진화적 적합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매함이 인간 같은 생물학적 존재로 하여금 여러 파트너와 더불어 많은 섹스를 할 가능성을 높인다면 자연선택은 이런 생물학적 존재가 우매하게끔 작용할 것이다. 섹스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손을 낳으려면 최소한 성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생존해야 하고, 이상적인 경우 그보다 좀 더 오래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138p)

 

 

따라서 잘못된 확신을 지녀도 그것이 그리 큰 피해를 가져오지 않을 때도 비합리적 확신이 생겨날 수 있다. 높은 존재의 은총을 믿으면 안 될 게 뭐란 말인가? 또는 때로 미신적 의식에 참여하거나 작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면 이런 잘못된 확신의 대가는 그리 크지 않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별로 손해가 나지 않는 오류는 이것들이 진화적 적합성 면에서 별로 중대하지 않기에 존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비이성적 경향은 맹장의 충수 돌기, 귓불, 혹은 남성의 젖꼭지와 비슷한 것이다. 진화사의 곁가지이자 자연선택 차원에서 사라지지 않더라도 생존이나 번식 면에서 별로 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격세유전 정도인 것이다.(139-140p)

 

 

여기서도 세계를 가능하면 현실에 충실하게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순한 비용-편익-계산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두뇌를 설계하는 진화에게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는 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알 바 아니다'.

진화는 뇌를 굉장히 예민한 패턴 인식 기계이자 행위 감지 기계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생존하고 번식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비합리적 결론, 확신,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식적 오류를 저지른다. 그러나 오류 관리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현실을 오인하는 것은 적응적일 수 있다.(144-145p)

 

 

법률가이자 사회과학자인 예일대학교 댄 카한 교수는 확신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보여주기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기후변화나 진화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확신은 관련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 혹은 그 지식이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전달되는지와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그런 솩신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정치 진영이 표방하는 가치와 맞아떨어지느냐가 중요하다. 가령 단결이 중요하냐, 자기 결정이 중요하냐,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느냐, 이익을 관철시키느냐,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사느냐, 자연을 지배하느냐. 카한에 따르면 확신은 그 자체로 독립된 산물이 아니라 늘 배경에 좌우된다. 그는 서로 다른 집단이 기후 변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다른 견해 사이의 논쟁은 오히려 '문화적 지위 경쟁'이라는 것이다.(159p)

 

 

다시 말해 인식적 비합리성은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며, 결코 병리학적, 즉 망상적 확신이나 취약한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다. 진화적 안경을 쓰고 관찰하면 인식적 비합리성은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며, 오류가 아니라 기능이다.(168-169p)

 

 

호주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 제이컵 호위는 이 문제를 문도 창문도 없는 집 안에 갇힌 사람의 상황에 비유했다. 바깥세상에서 주어지는 유일한 신호는 벽을 두드리는 소리뿐인 상황에서 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든 알아내야 한다. 깜깜한 집에 갇힌 사람처럼 두개골 블랙박스에 갇힌 뇌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 데이터가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반영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데이터가 곧 세상이 아니며, 세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데이터는 감각기관이 무엇을 받아들이는지만 보여줄 따름이다.

가령 주변 공간을 보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눈의 망막은 뇌에 2차원적 데이터만 공급한다. 세 번째 차원은 순수 해석의 문제다. 밖에서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세상에서 어떤 대상과 사건이 감각 데이터를 유발하는지, 뇌는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활성 패턴을 통해 상황을 유추할 따름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뇌는 신뢰할 수 없는 감각 데이터(인풋)에서 가능한 원인을 유추해 전 유기체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행동(아웃풋)으로 반응해야 한다.(182p)

 

 

확신이 쓸모 있으려면 안정적이어야 한다. 확신은 '큰 그림', 즉 커다란 연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블랙박스 속 예측 기계가 바깥 세계에 부여하는 법칙성이다. 많은 것이 변할지라도, 전반적으로 세상은 상당히 안정적이다. 법칙은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것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확신에 굳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진화적으로 적응적이다. 굳은 확신이 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연선택상의 이점을 제공한다는 점을 차치하고도 말이다. 확신(내지 확신의 토대가 되는 예측)은 뇌가 사용하는 트릭으로, 뇌는 이 트릭을 활용해 감각기관이 공급하는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에 안정된 질서와 구조를 부여한다.

그 밖에 우리는 이렇게 예측하는 일이 원래 어디에 좋은지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 뇌에 중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인 세상에서 가능하면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다. 생존 가능성과 재생산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잘 지내려면 행동을 분명히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211p)

 

 

'존재''당위'로 연결시켜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우리는 기술적 진술에서 직접 규범적 진술을 이끌어낼 때 이런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존재로부터 어떤 것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뭔가가 자연적이기에 좋은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칭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적 비합리성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서술에서 인식적 비합리성이 규범적 의미에서 좋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바로 이런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된다.(300p)

 

 

뇌가 내적 모델의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예측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확신 역시ㅡ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확실하다고 여긴다고 해도ㅡ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가설일 따름이다.

우리의 확신이 가설이라는 것은 그것이 언제든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는 뇌의 수만큼 많은 서로 다른 내적 모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모델들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이 모델들이 우리가 똑같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유전적 소인이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른 만큼(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경험을 하기에) 모든 뇌는 자신의 개인적 내적 세계 모델을 바탕으로 기능한다.

확신이 생겨나고 기능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각자의 확신이 서로 많이 다를 거라는 건 분명하다. 확신은 각자의 경험과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웠거나, 묻지 않고 넘겨받은 인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열과 성을 다해 확신에 차서 그것을 표방한다. 우리가 확신을 확신 있게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뇌에서 이루어지는 예측의 위계질서 안에서 확신이 하는 기능 때문이다. 새로 주어지는 정보에 따라서 금세 확신을 뒤집는다면 확신은 확신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그 밖에도 그리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확신을 표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관철시키도록 도와준다.

어느 정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야 쓸모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금방 뒤집히는 확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모든 확신은 원칙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가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확신에는 그것이 틀릴 가능성이 내재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사회적 영향은 우리 모두가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확신을 고수한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를 '정신 나간'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확신에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확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을 고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사실은 겉보기에만 딜레마다. 딜레마처럼 보이는 것은 존재를 당위로 그릇되게 연결하는 데서 비롯한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적응적이며, 자신의 확신을 흔들림 없이 고집하는 것이 지금 여기 우리 삶에도 더 유익하거나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확신을 부여잡는 것이 타인과 더불어 공존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지식 있는 생물종'으로서 이런 진화적 경향에 '반하여 행동할' 자유가 있다.

이런 자유를 활용해 능동적으로 확신을 의문시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확신이 다른 사람들의 확신과 충돌할 때는 그래야 한다.(306-308p)

 

 

불확실함은 거부감과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에 도무지 견디고 싶지가 않다. 확신을 주는 확실하고 안전한 상태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안정감 있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서로 심각한 갈들을 빚는 충돌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성을 용인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으며, 이 일 역시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면 가장 좋을 것이다.(332p)

 

 

 

 

ㅡ 필리프 슈테르처, <제정신이라는 착각>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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