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부끄럽지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작가의 초기작으로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기본적으로 가벼운 소품의 느낌이고 장 구분이 확실하고 편집이 시원시원해서 편하게 읽힌다. 이 단편집으로 쿤데라의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으나 초기작임을 감안 했을 때 앞으로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쓰였는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고 확인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장편에 대한 대략적인 시놉시스의 느낌으로 볼 수도 있는 등 여러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쿤데라의 작품에 부담을 느끼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입문작으로 흥미를 유발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몇 작품은 단편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아이러니, 기승전결이 확실한 진행, 깨알 같은 유머 등으로 읽는 동안 즐거웠다. 많은 궤변들 중에서도 불쑥불쑥 나오는 인생에 새길만한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으나 그런 문장들을 400~500p 분량의 장편에서 간단없이 만나면 어떨까 싶기는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멸이니 농담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니 하는 책들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금방 던져버리는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빠른 시일 내에(언제?) ‘농담이나 불멸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우리 삶에 대해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높은 벽의 보호 아래 호기심 어린 시선들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저 괴짜들처럼 살고 있었으니, 왜냐하면 이들은 한 가지 작은 사실, 즉 이 벽들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은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33p)

 

사람들의 삶에는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의미들이 있어요.” 교수는 말했다. “우리 중 그 누구의 과거든 사람들이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아주 사랑받는 국가 원수의 전기가 될 수도 있고 범죄자의 전기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선생님 본인 경우만 해도 한번 잘 들여다보세요. 회의에 모습을 보인 적도 별로 없고, 나타난 경우조차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었죠. 선생님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어요. 나도 우리가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불쑥 농담을 던져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의심들은 당장은 잊히지만 오늘 과거 속에서 다시 건져 올리게 되면 갑자기 정확한 의미를 담게 되는 겁니다. 또는, 선생님이 지금 자리에 없다는 대답을 듣게 했던 그 모든 여자들을 떠올려 보세요. 아니면 선생님 최근 연구를 봅시다. 누구든지 그 논문이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입장에서 씌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건 각기 다 다른 일이에요. 하지만 현재의 죄목에 비추어 이 모든 걸 같이 검토하게 되면 선생님의 정신 상태와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일관적인 총체를 이루게 되는 거죠.”(42p)

 

있잖아, 클라라, 당신은 거짓말이 다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난 아무거나 다 지어낼 수 있고, 사람들을 조롱할 수도 있고, 온갖 속임수를 다 꾸며 낼 수 있고, 온갖 농담을 다 할 수 있지만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아. 그런 거짓말들은, 당신이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게 나야, 있는 그대로의 나. 그런 거짓말들로 나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 그런 거짓말들로 나는 실은 진실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어. 내가 깊이 알고 있는 것, 내가 의미를 알고 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어.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난 장난치지 않아. 거기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건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고 난 그럴 수 없어, 나한테 그걸 요구하지 마, 난 하지 않을 거야.”(53p)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모험이라는 말에 안장을 맸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스스로 방향을 잡아 말을 달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일 뿐임을. 그 모험들은 어쩌면 전혀 우리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임을. 그 모험들은 전혀 우리를 특징지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 모험들의 기이한 흐름에 전혀 책임이 없음을. 그 모험들 자체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다른 어디로 향한 채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56p)

 

그녀를 알기 전에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는 덜 섬세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때에도 그는 의지가 강하거나 저돌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전혀 거칠고 악마적인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남자 같지는 않았다 해도 그래서 더욱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분명 상당히 순진한 욕망이었지만 어찌 하겠는가. 어린아이 같은 욕망들은 어른의 정신의 모든 함정들을 다 벗어나 때로 저 머나먼 노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 같은 욕망은 어떤 역할이 주어지면 그 속에서 구체화 될 기회를 잡는다.(115p)

 

중첩된 그 두 이미지는 그의 여자 친구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그녀의 영혼에 끔찍할 만큼 한계가 없으며, 그 영혼에는 충실함과 부정이, 배신과 결백이, 요염한 애교와 수줍은 부끄러움이 같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야만스러운 뒤섞임은 그에게 뒤죽박죽 쓰레기 더미만큼 역겨웠다. 중첩된 두 이미지는 여전히 서로 투명하게 비치며 나타나고 있었고, 청년은 자기 여자 친구와 다른 여자들 간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 그녀의 존재 저 깊은 내면에서는 다른 여자들하고 똑같고, 온갖 생각, 온갖 감정, 가능한 온갖 악덕이 다 있어서, 그것이 그의 은밀한 질투와 의심을 정당화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는 단지 그의 욕망이, 그의 추상적인 생각이, 그의 믿음이 만들어 낸 것일 뿐, 실제의 그녀는 절망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여러 모습으로, 그의 앞에, 거기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혐오했다.(134p)

 

그런데 있잖아요, 어쩌면 바로 그래서 제가 그녀를 거부하는 건지도 몰라요. 필연성에다 대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인과 법칙에 다리를 걸고 싶은 거예요. 우주의 흐름의 그 음울한 예측 가능성을 자유의지의 변덕으로 실패하게 하고 싶은 거 말이에요.(151p)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것에만 책임이 있다면 바보들은 애초에 모든 잘못을 면제받겠군. 하지만 플라이슈만, 사람은 알아야만 할 의무가 있지. 사람은 자신의 무지에 책임이 있는 거야. 무지는 잘못이야. 바로 그래서 그 무엇도 자네 잘못을 사해 줄 수 없는 거고, 따라서 자네가 부정할지라도 자네는 여자들한테 상놈처럼 행동한다고 나는 선언하겠네.”(153p)

 

조금 전에 과장님이 왜 제가 엘리자베트를 거부하는지 물으셨을 때 제가 자유의지의 아름다움이니 꼭 지키고 싶은 자유니 하는 허튼소리를 했지요. 그런 건 진실을 가리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고, 사실은 완전 정반대에다 전혀 기분 좋은 게 아니에요. 엘리자베트를 거부한 건 바로 제가 자유로운 인간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거든요. 엘리자베트하고 자지 않는 것이 요즘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아무도 그녀하고 자지 않고, 또 만약 누군가 잔다 해도 모두들 비웃을 테니 그렇다고 시인은 못 할 거예요. 유행이란 무시무시한 용이죠, 그래서 전 비굴하게 복종한 거고요.(179~180p)

 

사람들이 하는 말의 99퍼센트가 헛된 말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그러시는군요. 당신 자신도 대부분 그저 말하기 위해서 말고 다른 무엇을 위해서 말을 하시나요?”(184p)

 

나이 든 남자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자신의 초라한 잔재이기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금의 자기가 아닌 척하는 것 말고 남은 게 없어요. 아주 공들여 위장을 해서 이젠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것,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만들어 내는 일 말고 남은 게 없다고요. 지어내고, 연기하고, 쾌활함, 활기, 다정다감함을 흉내 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젊은 이미지를 다시 살려 내고, 그것과 한데 섞이려고 노력하고, 자기를 그것으로 대체하는 수밖에요. 과장님의 이 희극에서 난 내 모습을, 내 자신의 미래를 봅니다. 나한테 아직 체념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남았다면 말이에요. 체념은 이 우수 어린 희극보다 틀림없이 더 나쁜 악이겠죠.(191p)

 

그는 무슨 의미로 조금 살았다고 한 것일까? 여행, , 사회생활, 스포츠, 여자들을 생각했을까? 물론 이 모두를 다 생각했겠지만 문제는 무엇보다 여자였다. 다른 영역에서 그의 삶이 초라했다면, 그것이 얼마간 괴롭기는 해도 그 초라함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직업이 별 볼일 없고 전망도 없다고 해서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돈도, 간부 조직의 허가증도 없어서 여행을 못 했다고 해서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스무 살 때 관절 반달이 부러져 좋아하던 스포츠를 포기해야 했다고 해서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반면에 여자의 영역은 그에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계였고, 그러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핑계도 둘러댈 수 없었다. 거기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는 그에게 삶의 농도를 재는 단 하나의 타당한 기준이 되었다.(207p)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었고, 생각이란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오로지 한 가지밖에 모르는 그 마음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었다.(231p)

 

 

밀란 쿤데라, <우스운 사랑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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