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

 

 

글쎄. 표지 보고 진짜 재밌을 줄 알았는데...

 

 

예술 작품의 주인은 단일 저자라는 환상은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인터넷 밈의 저자는 여기저기에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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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막 시작하던 1709년 앤 여왕법으로 확립된 저작권법은 존 로크의 사유에서 영향을 받았다. 개개인이 노동을 투여한 자연물에는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이 생긴다는 이론이 반영된 것이다. 작가가 쓴 저작물도 그만큼의 노동을 투여했기에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권이 인정된다. 이 법은 탄생할 당시만 하더라도 작가를 출판사에서 보호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이때 저작권을 갖는 것은 대체로 타인이 따라 할 수 없는 예술가 개인의 탁월한 재능이 발휘된 작품이다. 저작권은 자연스레 단일 저자가 작품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만든다. 그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의 흔적은 지워진다. 과연 인터넷 밈이 유행하는 시대에도 근대적인 저자성이 유효한가? 라는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저작권법에 근거한 근대적 저자성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밈 시대에 따르는 새로운 저작권 법이 생겨나야만 한다는 것이다.(61p)

 

 

보통 드립이 성공하고 베스트에 오르려면 상대가 곧장 웃을 수 있는 소재를 써야만 했다. 음담패설이나 소수자 비하, 외모 비하 등 맥락을 이해할 필요 없이 상대를 깎아내리면서 직관적으로 웃음을 유도하는 농담이 속출했다. 일베와 디시 문화를 연구하는 여러 사회과학자는 일베에 퍼진 극우 사상의 기원으로 드립을 지목하기도 했다.

드립은 말 그대로 즉흥성에 기대고 있다. 즉흥적으로 내뱉은 드립에는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다. 보통 웃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 자신의 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국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내뱉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고소당할 위기에 봉착하면 상대방을 선비로 몰아세우고 자신이 한 말을 농담이라 치부하기 마련이다. 즉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 선택'은 결과는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립을 태생부터 문제적 수사라며 죄악시하고 금지한다면 우리는 인터넷 밈을 마음 편히 쓰지 못한다. 오히려 드립과 그에 기반하는 인터넷 밈이 공공적인 놀이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중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드립을 시작으로 생긴 합성 소스의 쓰임이 규칙을 생성하고, 그 규칙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리는 원본에 깃든 부정적인 뉘앙스를 중화할 수 있다. 비주류 문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되듯이 말이다.(146-147p)

 

 

모든 이론은 그것이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발표되더라도 바로 그 산업에 대한 관측 형태로 귀결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용의 궁극적인 주인은 자본주의 자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모든 것을 전유하고 다시 프로그램화하는 자본주의 자체인 것으로 판명된다.

 

크라우스는 "모든 아방가르드적 저항을 그 자체의 경로로 흡수하여 그것을 그 자체의 계좌로 돌리는 자본주의가 전용의 주인"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펑크 등 하위문화의 유산은 더 이상 자본주의에 별다른 타격을 끼치지 못한다. 체 게바라 프린팅 티셔츠가 체 게바라보다 더 인기가 많은 법이니까. 이 같은 아발가르드의 한계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마저도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게끔 되는 자본주의의 불가항력을 드러내고야 만다. 자본주의는 저항마저도 상품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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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을 사용한 인터넷 밈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부조리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수단이 된다. 비판적 사유를 좌파라고 낙인찍고 억압하려는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 밈의 역할은 중요하다. 비판적 사유를 심되, 그것을 밈이라는 형식에 감출 수 있어서다. 인터넷 밈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비판을 유머로 무마하듯이, 그 반대로 유머를 통해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꾸준히 유행하는 대학원생 밈이 그러하다.(168-170p)

 

 

억지 밈은 밈을 통해서 형성된 공동체가 자본이나 정치 등의 인위적인 요소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터넷 밈은 자본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순간 어떠한 브랜드나 상품의 상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 밈은 담론으로 포섭된 순간부터 기성세대의 몰이해로 인해 의미가 달라지기에, 밈 유저는 이에 반발심을 지닌 채로 해당 밈을 죽은 밈으로 만들거나 다른 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179p)

 

 

22호가 세상에 나오도록 하려면 결국 일상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영화의 태도는 고리타분하다. 조가 22호에게 보여주려는 일상은 햇살에 비치는 낙엽이라든지 일발소라든지 디테일이 가득하다. 반명 그레이트 비욘드는 유치원 같이 단순하고 아기자기해 보이지만 실상 그 안은 삭막하다. 플라톤이 현실과 가상을 가르듯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삶이 가상이며 잠깐의 일탈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온라인 허상에 불과하며 오프라인이 온라인보다 더 본질적이라는 시선에 갇힌 사이버스페이스의 상상력은 오늘날 시대착오적이다. 무선인터넷이 활성화되고, 인스타그램 등 SNS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어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흐려졌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의 정체성이 오프라인의 나를 결정하기도 하는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버스페이스를 향한 상상력은 지금 더욱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든 SNS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지금, 구세대에게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에 더욱 매료되어 있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189-190p)

 

 

과거에는 저만의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싸라든가 아무리 심해도 비호감 정도로 불렀지만, 이제는 그들을 빌런으로 여긴다. 한때 다른 것을 틀린것이라 부르지 말자는 유행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단소 살인마, 1호선 광인 등과 같은 '지하철 빌런'을 인터넷 밈으로 소비하며 조롱과 열괄을 오가는 우리의 시선이 프릭쇼를 즐겼던 관객의 시선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한술 더 떠서 이제는 평균 연봉에 다다르지 못한 사람을 모두 게으르기 그지 없는 존재로 대하는 풍경을 SNS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정상성을 고정하기 위해서 괴인을 발명한다.(197p)

 

 

 

 

ㅡ 김경수,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中,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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