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

 

진단과 분석은 탁월하나 대안은 여전히 원론적인 이야기다.

 

 

 

수능이란 결국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한 오지선다 시험으로, 그 특성상 신비평주의 사조와 궤를 같이하게 됩니다. 1920년대에 태동한 신비평주의는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텍스트 그 자체를 이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비평이론의 한갈래입니다. 즉, 종래의 문예비평에서는 작가의 삶이 강력한 판단기준이었다면, 신비평주의자들은 글이 이루는 내적 질서와 외부적 이론을 통해 작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예컨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가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듯이, 하지만 해당 작품이 공존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 또한 사실이듯이, 텍스트가 작가를 배신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37p)

 

 

고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내용은 줄어들었는데 어째서 공부 시간은 늘어만 갈까요. 한국의 교육열이, 성취보다는 승리에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 아이가 미분계수의 쓰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아이보다 수학 성적이 1점이라도 더 높아야 하지요.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요. 달리 말하자면 청소년의 학습 부담은 안보 딜레마와 유사한 성격을 지닙니다. 한 나라가 군사력을 증강하면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군비 경쟁에 나서면서 최종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부담과 불안이 동시에 커지듯이, 교육에 대한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대학 간판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사회에 팽배한 이상, 교육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74p)

 

 

학습범위가 줄어들고 시험이 테스트하는 지식이 얕은 수준에 머무른다고 해서 학습 부담이 줄어들지는 않으며, 그렇게 구성된 시험의 경쟁 압력이 강해질 경우 시험의 합당성이나 적절성은 오히려 퇴보한다는 결론이 가능하겠습니다.(106p)

 

 

정리하자면 1960년대 전후는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에 머무르던 시기이자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던 시기입니다. 체계화된 사교육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지요. 그 소비층 또한 얇았습니다. 수강료를 내고 강의실에 앉을 여력조차 없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던 겁니다. 방송 인프라가 부족하니 TV 강의를 기대할 수도 없고요.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강사가 나오지 못합니다. 반면 저자들은 책을 썼습니다. 출판의 힘은 인프라가 부족할수록 강해집니다. 책은 읽거나 옮기는 데 값비싼 수상기나 대규모 기지국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썩지도 않습니다. 남이 쓰던 것을 물려받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버려진 것을 주워서 읽는 일도 가능합니다. 게다가 대다수의 수험서는 독학을 전제로 쓰이니만큼 정권의 심기를 건드릴 일이 없습니다.

결국 '스타 저자'들의 등장 시기가 1960~70년대에 집중된 데에는, 90년대가 되어서야 1세대 '스타 강사'들이 나타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입니다. 기술 발전과 인프라 개선, 그리고 정치 구조의 변화가 맞물려 시장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이지요. 즉, 한국사회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사교육 시장은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형상을 갖췄습니다. 여기에 IT 열풍과 '스타 인터넷 강사'의 등장이 가세하면서, 사교육 시장에서 저자의 존재는 갈수록 희미해졌습니다.(132p)

 

 

시대인재가 명실상부한 업계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확장에 나서는 과정에서, 그런 '선발 효과'의 덕을 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금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업계 1위로 올라서기 전까지는 선발 효과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1990년대 후반 대성학원이 종로학원을 이기고 업계 1위에 등극했을 때는 '종로학원 등록을 거절당한 특목고 자퇴생들'을 받아 주었다는 외부 요인이 작용했지만, 2010년대 중후반부터 2020년대까지의 변화기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습니다. 강남대성학원이 급속도로 수험생의 민심을 잃을 만한 사건이 있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전이 가능했다는 것은 '원래부터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누리는'선발 효과 외에 다른 요인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능 콘텐츠가 바로 그 요인입니다.(176p)

 

 

다시 강조하건대, 2020년대의 입시 판도는 10년 전은 물론이고 5년 전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바뀌었습니다. 1부와 2부에서 설명한 수능 해킹과 사교육 서비스의 공진화가 거듭되면서 입시 전략의 복잡성과 요구사항의 허들이 크게 올라간 것입니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교과서만 달달 외워도 대학에 갔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인터넷강의쯤은 들어야 했고, 2020년대에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2000년대 초중반에 송고된 기사를 근거 삼아 "산간 오지에 사는 학생들도 인터넷강의를 듣고 대학에 가는데 지역 격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당시와 지금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과 그만큼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으니까요.

물론 "나는 2020년대에 수능을 쳤지만 인강만 듣고 좋은 대학에 갔다"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그런 사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공부에는 타고난 역량과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니까요.

(...)

다만 사회적 논의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대상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보다는 전반적인 경향성이며, 이 책이 다루는 내용 역시 큰 범주에서의 경향입니다(예컨대,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보다 키가 크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키 차이에 대해 어떤 사실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를 논하려면 평균 키를 말해야 합니다).(200-201p)

 

 

'인터넷 강의는 지방을 죽이는 독이다'라는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터넷강의는 지역 학원가를 고사시킴으로써 지방의 입시 인프라를 해체했고, 이로 인해 정보의 사각지대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능이라는 영역에서 지방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217p)

 

 

확신할 만한 탈출구가 없다는 것, 비슷한 실력에도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과목의 점수가 매번 50점과 30점 사이에서 출렁거리는 상황은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고, 하필 30점이 수능에서 나와버린다면 큰 문제입니다.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수험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깔끔하게 받아들일 만하지만, 실력이 비슷한 학생들이 훌쩍 대학으로 떠나버리고 홀로 수능에 발목이 잡힌다면 견디기 어렵겠지요. 또래들보다 몇 년 씩 뒤처졌다는 감각에 행운의 부조리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정신 건강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253p)

 

 

저는 이제 3수를 끝낸 입장인데요. 해가 갈수록 제 실력이 50만큼 늘면 사람들이 100만큼 고인다는 걸 느껴요. 왜 그런가 생각을 해봤더니 지방 메디컬 간 애들은 또 최대한 인서울로 올라가려고 한번 더 치고. 인서울 메디컬 간 애들은 그래도 약대보다는 수의대가, 수의대보다는 치대가 낫지 않나, 이런 식으로 계속 위를 보면서 치고. 결국 인설의(서울 시내 의대) 오면 또 인설의에서 메이저(서울대학교 의대를 비롯한 몇몇 인기 의대)로 가야 되지 않을까 해서 또 치고 이런 식으로 반복되니까.

그래서 저는 고3 학생들이 재수한다고 하면 웬만하면 반대해요. 제 주변도 그렇고 재수로 끝나는 케이스를 한명도 본 적이 없어요. 한번 더 하면 될 것 같아. 한번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하면서 무한정 N수를 반복해요. 재도전을 하면 실력도 오르지만 실력보다 꿈이 더 커져요.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커졌으니까 꿈도 이 정도 키워도 될 것 같거든요. 그러면 절대 꿈에 안 닿거든요. 그럼 다시 해요. 다시 하면 꿈이 더 커져요. 조금만 더 하면 의대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데를 더 갈망하잖아요.(270p)

 

 

또한 사교육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다양하고 과목별 특징이 존재하는 만큼 직무 형태 또한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 이에 따라 도급제 노동과 임금제 노동이 혼재된다는 점, 각자의 동기와 입장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정당한 급여가 논의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TA 조교가 겪는 일과 강사 조교가 겪는 일은 다르며, '스타 저자가 되려는 꿈을 품고' 출제팀에 들어온 사람과 ' N수 비용이 필요해서, 겸사겸사 공부도 할 겸' 검토자가 된 사람의 경험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장 대학 입시가 급한 판에, 거쳐 가는 일자리의 노동 여건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지요.

그리고 또다른 복병도 있습니다. 바로 고용주를 향한 존경과 감사입니다.

(...)

결국 열정적인 염가의 노동력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서비스 규모와 품질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교육 노동의 문제는 다시 사교육 고도화의 문제가 됩니다.(294-295p)

 

 

결국 수능 콘텐츠 산업은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은 스타 저자와 강사들의 영예를 좋아 이 시장에 들어오며,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성공을 거둡니다. 나머지는 20대 초중반을 콘텐츠 생산에 소모한 상태로 신규 진입자들에게 밀려나 사라집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나마 탈락자의 초과노동에 힘입은 것입니다. 성공을 거두려는 이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품질뿐만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출제팀 체제하에서는 소모당할 보조 저자가 없으면 이토록 많은 문제를 쏟아내는 것부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수능 콘텐츠 산업은 스포츠 산업이나 연예 산업과 유사하면서도 다릅니다. 비록 스포츠 스타나 유명 아이돌은 수많은 탈락자들 위에 선 존재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탈락자들의 노동과 생산에 빚지고 있진 않습니다. 또한 해당 분야에서의 숙련도는 어떤 식으로든 누적됩니다. 베컴의 성공과 무명 축구 선수의 경기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촬영에 계속 참여할수록 능력을 잃는 조연출가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수능 콘텐츠 산업은 그 종사자의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필수적인 감각이 둔해질 공산이 큰 분야이고, 따라서 원활한 생산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젊음이 소모될 필요가 있는 분야입니다. 개개인의 악의나 착취적 의도가 결부되지 않더라도 구조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316-317p)

 

 

대학들은 단순히 학생들을 선별하는 데에서 그치는 대신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되어 게임에 참전합니다.

예컨대 2022학년도에는 서울대가 정시모집군을 가군에서 나군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러자 연세대와 고려대가 나군에서 가군으로 옮겨갔지요. 같은 모집군 안에 있으면 서울대와 정면대결을 벌여야 하는 반면, 다른 모집군에 있으면 '서울대를 주력으로 쓰되 보험이 필요한 학생'들을 거두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성균관대의 일부 학과에 불똥이 튑니다. 소프트웨어학과의 경우 고려대·연세대와 같은 군이 되었을 때 누적백분위 커트라인이 1% 이상 하락했을 정도니까요.

(...)

과목별 반영비율을 정하거나 변환표준점수를 보정하는 작업에도 동일한 역학이 존재합니다. 과목 반영비를 2:4:3과 3:4:2 사이에서 선택한다거나, 난도가 유독 높았던 과목에 대해 극단적인 '물보정'을 적용한다거나 하는 시도에는 결국 '상위 대학이 놓친 학생들, 경재 대학에 갈 학생들을 우리가 데려가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대학이 입시전형 파편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핵심 기제입니다. 경쟁 대학과 반영 방식이 상이해지도록 반영식을 바꾸면, 조정된 반영식 기준으로 유리해진 학생들은 경쟁 대학에 지원할 가능성이 낮아지니까요.(419-420p)

 

 

2024학년도 성균관대 입시를 보면 대학이 매년 정시 결과에 따라 실질반영비율을 조작하며 기존 입시요강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해당 연도에는 영어가 특히 어렵게 출제되었습니다. 평년에는 절대평가 기준 8~9% 선이었던 1등급 비율이 4%대로 곤두박질쳤지요. 이는 고득점자 중에서 영어를 망친 학생들이 늘어났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성균관대로서는 '고려대·연세대에 갈 수 있었지만 아쉽게 미끄러진 학생들'을 주워 담을 기회입니다. 이에 따라 성대는 영어 1·2등급을 구분하여 감점하던 작년까지의 기조를 원서 마감 3주 전에 뒤집어, 영어 변환표준점수를 1·2등급 132점, 3등급 129점, 4등급 103점으로 발표하지요. 이렇게 되면 모집요강에 쓰인 '영어 반영비율 10%'는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3등급까지는 사실상 1등급과 동일하게 처리하고, 4등급 이하는 볼 것도 없이 탈락시키겠다는 의미니까요.(424-425p)

 

 

즉, 문제의 본질은 각 영역의 주권자(수능에서의 평가원, 학교에서의 교사, 원서 영역에서의 대학········)가 공익이 아닌 편익(보신주의, 통제력, 대외적 위상·······)을 위해 재량권을 남용함으로써 공교육 현장이 거기에 말려들고, 대응 과정에서 학생 부담이 커지며 사교육이 팽창하는 데에 있습니다. 사회적 격차 심화와 학벌주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폐단입니다. 게다가 ('특목고 학생들 많인 뽑고 싶다'는 동기를 '대학 자율성' 논의로 가리는 것처럼) 편익을 전문가적 명분 뒤에 숨기다보니 문제제기가 어렵거니와 명분 자체가 껍데기로 전락합니다. 양두구육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밀가루를 가루약으로 속인다면 환자는 다른 약을 구하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기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권자만을 탓할 수 없는 것은 한 영역의 주권자가 다른 영역의 '을'인 경우가 잦으며, 이에 따라 별도의 권력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을'들 역시 일방적으로만 당하는 대신 권력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이익을 얻어가기도 합니다. 학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즉, 교육 영역에서의 문제 상황이 '비용 떠넘기기'와 '해킹'의 연쇄로 나타난다 치면, 누구 하나만 해킹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가원과, 대학과, 고등학교와, 사교육과, 학생 모두가 자기 몫의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자기 몫의 과오와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3부에서 논했듯 수시와 정시는 분리된 제도일지라도 밀접히 엮여 있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의 전략이 다른 영역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주게 됩니다. 각각의 영향력이 다양한 층위에서 뒤섞이다보니 어느 하나의 책임만을 묻기가 더더욱 까다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양비론이나 상대주의를 펼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는 그 용법상 "우리 중 누구도 잘못이 없다"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각 영역의 위계가 존재하는 이상, 주도하는 측과 적응하는 측이 나뉘는 이상 각 플레이어의 과실 비율은 상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이 권력 게임의 최상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다시 말해 게임판의 문제는 그 자체로 다루더라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대학에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의 선발권과 결정권, 재량권이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와 결합하며 대학의 에고티즘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게임판을 왜곡시키는'구조의 연결고리를 해체해야 합니다.(450-452p)

 

 

 

ㅡ 문호진, 단요, <수능 해킹>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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