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6

 

 

그런데 해러웨이가 내세운 사이보그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페미니스트 화가 린 랜돌프가 그리기도 했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이미지는 가슴에 IC칩이 부착된 유색여성이었고 그의 손가락은 고양이과의 그것과 해부학적인 구조가 흡사했다. 해러웨이가 제시한 새로운 사이보그는 여성-동물-기계가 융합된 모습이었다. 이 형상은 이중으로 불경스러운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남성의 전유물인 기계를 탐했다는 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무구한 자연적 신체인 여성과 동물을 파괴적 기계와 결합했다는 면에서 그랬다. 이는 사이보그 재형상화를 통해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사이보그를 통해 전쟁과 정복의 야욕에 혈안이 된 테크노사이언스와 대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구한 여성성에 호소하는 정체성의 정치에도 대항하려 했다.(25-26p)

 

 

자연은 문명의 자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호되어야 할 고귀한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자연은 문화와 분리된 저 어딘가에 있는 황야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연문화natureculture였다. 자연-문화가 아님을 주의하시라. 자연과 문화는 하이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해러웨이는 자연과 문화는 분리된 채로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자연문화임을 주장한다. 「반려종 선언」은 개와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이를 이야기하는 책이다.(29p)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의 상호적인 협동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일방적인 정복의 신화에 맞서고자 했다. 하지만 협동의 역사를 일구어 왔다고 해도 목줄에 매여서 묶여 있는 것은 개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 엄연한 사실이 내게 소화불량을 유발한다. 「사이보그 선언」에서부터 해러웨이가 지속적으로 해온 작업은 상대적으로 권력이 취약한 자들을 수동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권력이 약한 자들을 고통받는 피해자로만 위치시키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노예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지금/여기의 이 세상을 만든 책임을 그들(남성들)에게 떠넘기게 되면, 도덕적인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노예상태를 면하기는 어렵다. 무구한 노예로 살면서 혹시 올지도 모를 구원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이 약한 자들은 무구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 수 있을까를 모색하는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와 인간 사이에, 여성과 남성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평등한 권력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권력이 약한 자들의 삶은 취약성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반려종 선언」이 탐사하는 개와 인간이 함께 일구어온 진화적이고,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개와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 놓인 자들에 대한 아주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지만, 위화감과 체기가 가시지는 않는다. 어질리티 경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품종 개발도 인간의 기준이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적으로는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을 당하고, 정치적으로는 난민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조그만 차이에 대해서도 극심한 혐오가 난무하는 위급한 시대에, 어질리티 게임 이야기는 다소 위화감을 주기까지 한다. 해러웨이는 미국의 대학 교수로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는 계급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가 미즈 카이엔 페퍼와 즐기는 어질리티 스포츠는 돈도 많이 드는 경기이고, 필시 그의 이야기는 백인여성의 경험이 잔뜩 묻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처한 역사적이고 계급적인 상황을 벗어나서 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특정한 상황 속에 있고, 그 상황 속에 있는 유망한 실천들을 건져 올려야 한다. 해러웨이는 카이엔과 어질리티를 연마하면서 종도 종류도 다른 자들이 접촉지대에서 눈길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응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특정한 계급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그 배움이 가치 없게 되지는 않는다. 배움은 상황 속에, 무구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고, 누구도 무구한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소화불량이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소화불량의 느낌을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해소하려는 싸움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평등해지는 꿈같은 날을 기준으로 현실을 비난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이것으로 최선이라고 재빨리 소화제를 삼켜서 도덕적 편안함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 살 만한 세상을 위한 지속적인 싸움을 주저앉히는 반동이 될 것이다.

소화불량의 느낌은 싸움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싸움을 지속하게 하고, 응답의 불충분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응답을 모색하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편안함을 방해하기에 이제 그만 됐다고 문제를 종결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소화불량의 그 갑갑한 느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싸움을 계속하게 하고, 응답-능력을 키운다.(61-63p)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공-산의 함의는 이렇다. 함께 만든다고 해도 주체와 대상은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주체이기만 한 것도 전적으로 대상이기만 한 것도 없다. 공-산은 모두 힘을 합쳐서 무언가(대상)를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가 나의 몸을 만들고, 나는 상대의 몸을 만든다. 상대가 만들어준 나의 몸으로 다시 상대를 만들기에 참여한다. 그래서 사실상 나는 상대와 함께 그의 몸을 만드는 셈이다. 이는 상대가 나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나는 상대를 부분적으로 만들고, 상대는 나를 부분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은 번갈아 바뀐다. 하지만 이것이 곧 기계적인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분성이라 할지라도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모두 같지는 않고, 능동과 수동의 양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공-산의 또 다른 함의는 만들기에 개입되는 모든 주체들의 권력이 동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뜨기놀이는 실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실뜨기의 릴레이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성실"이 요구된다. 그것은 내가 수동이 되었을 때, 상대가 실뜨기를 할 수 있도록 가만히 패턴을 내밀어주는 성실이고, 비록 결말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열려 있을지라도, 어떻게든 플레이를 이어나가는 성실이고, 상대가 내민 패턴에 기계적으로 응대하지는 않을 성실이다. 기계적인 응대는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해서 상대의 성실한 노력을 잠식하고, 종국에는 실뜨기가 중단되게 만든다. 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공-산의 함의는 계속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실뜨기의 패턴이 릴레이 되어온 것처럼, 공-산의 관계도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그것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실뜨기는 실을 놓치기 쉬운 놀이다. 공-산 또한 실패하기 쉽다. 그 많은 멸종들을 생각해보라. 일방의 실수이든, 일방의 탐욕이든, 혹은 우발적인 어떤 이유이든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럼에도 공-산적인 파트너 관계가 중단되지 않고 오랜 세월 이어져 올 수 있었다면, 그들 사이에는 필시 상호 의존을 위한 윤리와 정치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예외주의는 이러한 윤리와 정치를 실종시킨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삶의 계속성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70-71p)

 

 

마굴리스와 세이건이 말하는 공생발생에 근거한 진화모델은, 협력적인 개체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생존경쟁에서 우리하다는 집단유전학의 협력모델과는 다른 것임을 지적한다. 소화불량의 사태는 우발적인 사태이지, 살아남으려면 협력하라는 지상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다. 마굴리스의 공생발생모델은 숙주+기생자의 이익교환의 협력모델이 전혀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접촉과 먹기, 침입, 감염, 흡수합병 등 살벌한 관계가 일차적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실패가 그렇지 않았다면 적대적이었을 관계를 전혀 다른 관계로 변모시켰다.(76p)

 

 

마굴리스가 제시한 공생의 모델 시스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다. M. 파라독사는 낮은 배율의 현미경으로 보면, 단세포 섬모충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다섯 종의 생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섬모를 가진 구형의 박테리아 부대와 머리카락 같은 스피로헤타들의 군체가 그들이다. M. 파라독사는 오스트레일리아 흰개미의 내장에 산다. 나무를 갉아먹는 흰개미는 M. 파라독사가 없으면 섬유질을 분해하지 못한다. M. 파라독사가 흰개미의 내장에 살 수 있는 것은 흰개미가 먹이에 섞여 들어간 M. 파라독사를 소화시키지 못해서이다. 개미가 소화시키지 못한 M. 파라독사는 흰개미의 내장에서 섬유질을 분해하여 영양을 섭취한다. 이 모든 공생적 관계들이 먹기와 그것의 부분적인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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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은 불가능하고, 100%의 지배도 불가능하다. 그 실패가 만들어내는 틈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가는 문이다. 생명은 기회를 잘 잡아채는 데 능하다. 새로운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토록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먹기를 포함한 많은 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77-79p)

 

 

크로셰 산호를 전시하고, 여우원숭이에 관한 그림책을 만드는 예술실천은 떄로 사소해보일 수도 있다. 지구 온나화가 멈추지 않으면, 마다가스카르의 화전이 중단되지 않으면, 산호와 여우원숭이는 계속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야기된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마다가스카르의 화전이 계속되는 이유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술지팡이는 어디에도 없다. 쌍곡선 공간의 수많은 표면들은 요술지팡이라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고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서는 응답을 위한 수많은 표면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응답은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 관련도 없을 사람들을 공-산의 표면들로 불러 모은다. 산호와는 별로 관련이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다함께 산호의 삶에 뛰어들었고, 여우원숭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여우원숭이의 삶에 뛰어들게 되었다. 공-산의 상대에게 책임responsibility을 다하기 위해선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쌍곡선 공간은 응답-능력을 기를 수 있는 많은 표면을 제공한다.(92p)

 

 

타자에게 열린 질문을 하려고 하는 로웰의 인식론적인 태도는 데스프레가 "정중함의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 '정중함'이란 무엇보다 상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통념적인 믿음을 뒤로하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를 흥미롭게 할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요구한다. 호기심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답을 감지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이는 해러웨이가 종이라는 말의 어원에서 끄집어낸 경의, re-specere의 실천, 즉 몇 번이고 거듭 바라보는 실천을 요구한다.(94-95p)

 

 

이런 식의 박멸은 종종 생태계 침해종 제거, 혹은 종의 재배치라는 용어로 불리지만, 해러웨이는 이런 식의 명명법에 대해서 반대한다. 생태계 침해종 제거라는 말은 고양이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용어이고, 종의 재배치라는 말은 죽이기를 상당히 유화시킨 말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이기를 정당화하거나 감추는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누구에게든 '죽이기'라는 말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힘들고 고통스런 말을 정면으로 하지 않으면, 그 죽이기의 행위는 더 이상 논쟁거리도 아니고 재고의 여지도 없게 된다. 그래서 고양이 박멸은 고양이 박멸로 불러야 한다.

낙태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다. 해러웨이는 낙태합법화를 찬성하지만 임신중단이라는 말에는 위화감을 가진다. 임신중단은 낙태합법화를 위한 전략상의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의 지속이 어려운 성인 여성의 삶과 태아의 삶 중에서 성인 여성의 삶을 선택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다.(102-103p)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용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용어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지극히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종 일반의 행위로 이 원인을 돌려버리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쉽게 감추어진다. 이를테면 화석연료 채굴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에너지 기업들과 국가자본의 행위가 인간의 이름 뒤에 숨는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도시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시골마을에 핵발전소가 지어지고, 나바호의 토착민들은 석탄 채굴이 야기한 대수층 고갈로 물 부족에 시달린다. 하지만 인류세는 호모사피엔스의 행위라는 일반화된 이름으로 이 불평등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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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새로운 화석연료로 각광받는 셰일가스의 추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압파쇄라 불리는 이 공법은 암석 사이사이 스미어 있는 셰일가스를 추출하기 위해 고압의 액체를 지하 깊숙이 분사해서 심층의 광물들을 깨트린다. 그런데 지하에는 셰일가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가 흐르고, 그 지표에는 사람과 동물이 산다. 고압으로 분사되는 액체는 심층의 지층을 붕괴시켜서 지반 침식을 일으키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그 물을 마신 가축과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죽는다. 수천 년 혹은 수백년 살아온 동물들과 사람들이 삶이 수압파쇄라는 무지막지한 채굴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여기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피해를 당하는가? 인류세라는 일반화된 용어는 이런 질문을 숨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파괴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은 인류세가 아니라 당연히 자본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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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이런 변화와 더불어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야기한 변화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8세기 카리브해 연안에 있었던 노예쩨 하의 사탕수수농장과 21세기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로 경작되는 팜유농장을 빼놓을 수 없다. 산업화된 농업은 비단 사탕수수와 팜유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다국적 종자회사의 씨앗으로부터 나온다. 이 씨앗들은 대부분 불임으로 조작되어 있고, 종자회사가 생산하는 제초제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지극히 단순하게 만든다. 돈이 되는 작물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모두 제거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토착민들도 포함된다. 아마존의 토착민 중 카리푸나족은 이제 부족이 59명뿐이고, 그 부족의 땅 절반 이상을 불법적인 벌목꾼들에게 빼앗긴 상태다. 토착민들에게 강제로 빼앗은 땅은 브라질의 급성장하는 소고기 무역을 위해서 목장으로 만들어지거나 가축사료용 콩을 심는 농장이 된다. 이런 파괴의 시대를 지칭하는 이름은 플랜테이션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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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담론을 이끌고 있는 지구 온난화, 기후 급변과 같은 지구 시스템의 현상들은 복수종들의 관계 변화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114-117p)

 

 

해러웨이가 불어 어원까지 끌어들여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트러블의 의미는, 문제를 쉽게 해소해버리기보다는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상황을 잘 정리하기보다는 더욱 뒤섞어버리는 것이고,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쉬운 해결책을 찾고 그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트러블과 마주하면서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실의 트러블들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고 그 문제를 해소해버리려 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감추어진다. 하지만 복잡하고, 해결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더욱 해로운 일이다.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냉소와 무능과도 싸우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응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120-121p)

 

 

영어의 촉수tentacle는 라틴어tentare에서 유래했고, 그 의미는 "더듬다", "시도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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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가 "촉수적인 사유tentacular thinking"라고 부르는 것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피모아 쑬루Pimoa Chthulu'라는 이름을 가진 한 마리의 거미다. 이 거미는 여덟 개의 긴 다리를 촉수로 가지고 있다. 촉수는 외부로 뻗고, 어떤 상대를 자신과 연결한다. 신체와 신체의 접촉을 만드는 촉수는 때로 눈이 판단한 것을 무화시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도 한다. 보기에는 낯설고, 심지어 끔찍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촉수적인 느낌이 시각적인 인식을 애매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촉수는 외부로 뻗어나가지만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피모아 쑬루'라는 이름의 거미는 캘리포니아 중북부 삼나무 숲에서 사는 것처럼 촉수는 몸이라는 특정한 상황 속에 산다. 그래서 축수적인 인식은 저 하늘에서 굽어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총체적이고, 중립적인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 누구도 모든 곳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땅에 붙박인 자'들은 어떤 곳에 살지 모든 곳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에 붙박인 자'들의 인식이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익나 총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 인식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이다.

하지만 촉수적인 사유가 주관적이라거나 판단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황 속에 있는 자들은 혼자가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일상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해러웨이를 포함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자들은 중립성과 보편성을 무기로 가진 과학도 사실은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임을 주장해왔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과학연구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권력적인 이해가 반영되어 있고,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과학자들 역시 땅에 붙박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러웨이는 가장 객관적인 인식은 중립성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임을 주장한다. 촉수적인 사유는 이를 위한 형상이다.(124-125p)

 

 

 

 

ㅡ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中,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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