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8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서사가 없다, 약하다, 삽화적이다, 일화가 그냥 나열되었을 뿐이지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등등이죠.

그러한 서사에 대한 추구는 인생이 통일성과 정합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도블라토프가 바라보는 인생은, 세게는 그렇지 않죠. 그것은 부조리한 일화들의 느슨한 연결입니다. 커다란 통일성도, 정합성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도 없어요. 다만 도블라토프가 내세운 화자의 특유의 톤, 다시 말해 도블라토프의 테크닉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형성하는 거죠.

하지만 일상을 그렇게 일화적인 것의 느슨한 연속으로 파악함으로써 도블라토프에게 삶은 부조리하지만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굉장히 거대하고 정교한 악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악의들, 작은 실수들, 작은 부조리들이 있는 거죠. 일화의 특징이 뭐예요. 짧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도블라토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끔찍하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란 삶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그 삶을 사랑하는 데 있다.(60-61p)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떠한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이다." 그렇죠, 어떤 작품이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어서 불편하다느니, 예술 작품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들은 다 개소리입니다.(80-81p)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의하면 19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된 데에는 소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표준어가 정립되고, 단일한 언어로 쓰여진 소설이 널리 읽히며 '공감'의 공동체가 만들어진 거죠.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근대국가)을 형성한다는 것" "그 결과, 그때까지만 해도 낮기만 했던 소설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고진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죠.

한때 우리 사회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결국 '문학'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던 문학의 어떤 형태, 즉 '근대문학=소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92-93p)

 

 

이제 책은 더 이상 문자를 독점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유동적인 매체(뇌)에서 딱딱하고 고정적인 매체(책)로 옮겨갔던 문자는 이제 다시 유동적이며 검색 가능한 매체(인터넷)로 옮겨가는 중이지요.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억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과거의 어느 순간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책이라는 외부 저장 장치로 옮겨갔고, 이제 기억과 기록을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을 정도로 혼합된ㅡ내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ㅡ공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중에 있다고요.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일단 책 밖으로 뛰쳐나간 문자들을 도로 가둘 수는 없습니다. 방대한ㅡ거의 무한에 가까운ㅡ저장 공간, 간단한 키워드만으로 평생 읽지 못할 자료들을 찾아주는 검색 능력, 무엇보다 실시간 발행과 실시간 상호작용이라는 인터넷의 역량을 책을 결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책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책이 제공하는 종류의 정제되고 정돈된 지식을 인터넷은 제공할 수 없다'같은 말을 해봤자 별다른 울림을 갖지 못하겠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책을 반대하고 기억을 옹호한 소크라테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저는 책이 사라져도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책이 나왔다고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닌 것처럼요. 다만 지금과는 다른, 좀더 축소되고 분화된 역할을 맡게 되겠죠. 그게 무엇인지는 저도 알 수 없고,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는요.(104-105p)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는 체하고 있다면, 가족들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읽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있습니다. 읽기는 몰래 먹기입니다.

읽기는 금단의 열매를 먹는 것이고, 금단의 사랑을 하는 것이고, 시대를 바꾸는 것이고, 가족을 바꾸는 것이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고, 낮을 밤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읽기는 모든 것을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몰래'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읽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의 읽기입니다. 교과서를 읽고, 참고서를 읽고, 자기계발서를 읽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관한 책을 읽고, 육아나 요리에 관한 책을 읽고, 교양을 위해 가벼운 사회학 서적이나 대중심리학 서적을 읽고, 취미에 관한 책을 읽고····· 이것들은 우리를 바깥으로 데려가지 않고, 담을 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곳에 단단히 발붙이게 합니다. 이것을 '한낮의 읽기'라고 해두죠.

그렇지 않은 책, 다른 책,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나 시, 그리고 어떤 종류의 철학이나 이론처럼 우리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식수가 말하는 읽기죠. 저는 이걸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읽기' '한밤의 읽기'라고 부르고 싶어요. 밤에 읽어서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몰래' '밤으로 바꾸는'읽기니까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어느 한쪽의 책/읽기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독서를 말할 때면 너무 전자만, 그러니까 한낮의 읽기만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124-125p)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 읽기에 시간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닭볶음면처럼 짧은 시간에 나를 자극해서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혹은 사이다처럼 타는 갈증을 즉각적으로 시원하게 씻어주는 그런 콘텐츠를 찾을 수밖에요.

여기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 즉각 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가용 시간을 쏟아붓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용 시간을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쏟아붓는 사회는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치의 일을 모두 끝낸 늦은 밤, 책을 읽거나 다른 무언가를 할 기운은 없지만 그냥 자고 싶지는 않을 때 우리는 트위터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쇼츠를 보고 틱톡을 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작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시간을 확인하고 비명을 지른 다음 서둘러 잠자리에 듭니다. 아마도 내일은 더 피곤할 테고, 스마트폰 말고 다른 걸 볼 기력은 더욱 없겠죠.(145-146p)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24시간이 주어졌고, 우리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24시간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얼마 있지 않은 달콤한 밤의 시간을 쪼개고 희생해서 자기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저는 그중 하나가 한밤의 읽기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고 느껴져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눈앞에 보이는 가능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밤의 읽기입니다.(168-169p)

 

 

물론 글쓰기와 책 읽기, 혹은 문학이라는 것에는 어떤 종류의 '환상'이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쓰는 동안 내가 지금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내 삶이 나아지고 있고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까지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읽기와 쓰기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라는 행위의 핵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환상이 없다면 문학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롤랑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냐는 거예요. 쓰기와 읽기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어요. 하지만 환상과 기만은 같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반대로 어차피 환상이라면 그냥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아주 열렬히, 최선을 다해서, 마치 그것이 더없는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 생각엔, 적극적으로 환상을 이용하는 그들이야말로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독자들을 향해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으니까요.(177-178p)

 

 

여기서 읽기에 대한 작은 팁을 하나 드릴게요. 한번 책을 끝까지 읽은 다음 처음으로 돌아와서 서문이나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세요. 처음에는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하고,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하거든요. 꽤 재미있어요.(187p)

 

 

 

ㅡ 금정연, <한밤의 읽기> 中, 스위밍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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