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8

 

 

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했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유효하고 그 증명된 명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론은 자주 바뀌고 확실하다고 했던 이론도 폐기되곤 합니다. 그러면 원래부터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증명은 안 되었다 해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뭔가 믿을 만하고 다르다고 하고 싶은데, 과연 그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봅시다.(24-25p)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방법론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포퍼입니다. 포퍼가 말하는 과학의 정수는 비판정신이고, 그 정신은 모든 이론을 사정없이 시험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와 비교해 이론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이론이라도 아깝지만 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정말 있는지를 감히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리에 의해 세상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절히 기도드렸던 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역시 하느님의 뜻이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라든지 하느님께서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시련을 내리셨다든지 하는 식의 해석이 나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독실한 신자는 하느님은 존재하고 자애로운 분이라는 믿음을 유지합니다.

포퍼는 그런 식의 믿음이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고 본 것입니다. 과학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이론을 포기하고 더 좋은 새로운 이론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반면 종교적 교리는 불변하며, 신앙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포퍼는 그런 경건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과학적 태도의 정반대로 보았습니다.

 

포퍼의 철학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뿌리 박힌 것입니다.(28-29p)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가에 서 있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구하러 뛰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들러 파의 심리학자는 '아, 이 사람은 영웅적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면서 '역시 아들러 이론이 맞아'하고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러면 즉시 '이 사람은 우월해지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무력해졌어'하는 진단을 내립니다. 또 아들러 이론이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들러의 이론으로 문제없이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을 잘함으로써 이 이론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포퍼는 아들러가 이런 식으로 만나보지도 않은 환자에 대해 자신 있는 진단을 내리면서 엉터리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그 밑을 떠났다고 회고합니다. 결국, 뭐든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종교처럼 독단적이거나 음모설처럼 사람을 홀리는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포퍼는 판단했습니다.(30-31p)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조차도 북극이나 남극에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6개월 내내 밤이고 6개월 내내 낮이기 때문에, 방향은 둘째 치고 매일 아침 해가 뜨지도 않습니다. 또 정확히 북극점이나 남극점에 서면 동서남북의 개념 자체가 파괴되어버립니다. 북극점에서는 지구상의 어느 방향이나 다 남쪽입니다. 동은 뭐고 서는 뭔지 구분이 안 되고, 북도 실종됩니다. 머리 위(북극성을 향해 가는 방향)가 북쪽이고 발밑(남극을 향해 가는 방향)이 남쪽이라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북을 잡앚놓고 나면 평소에 생각하던 동서의 개념은 전혀 무의미해집니다. 이렇듯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 우리 지구상에 있는 북극점에만 가도 벌어집니다.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뜬다는 것은 북극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한정돼 있고, 우리의 상상력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습니까?(72p)

 

 

인간도 살다 보면 자신이 자주 경험하는 일에 버릇이 들어 방심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귀납적 추론의 근본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도 종종 당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가 갑자기 부서질 수도 있고, 차로 한강을 잘 건너가고 있는데 다리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

저도 사실 대학과 대학원을 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는데 조금 큰 지진도 두 번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일시적 충격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땅은 굳게 버티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시 계속 살았습니다. 그런 귀납적인 추론에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의론적인 의심에 사로잡혀 마비가 되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포퍼도 이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초인적인 존재라면 귀납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73-74p)

 

 

저는 과학이 자연에 숫자를 갖다 붙이는 '수량화'과정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은 수량화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매일 몇 도 몇 도 하면서 주워섬기는 온도도 원래는 차갑다, 뜨겁다 하는 질적인 개념이었지 수량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정 경험하는 온도는 느낌이지, 숫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지금 한 22도쯤 된다고 느낀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도계를 항상 보고 거기 나온 숫자와 자신의 느낌을 연관 짓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지, 덥고 추운 것 자체가 숫자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도 '뜨겁다', '차갑다'는 '습하다', '건조하다'와 함꼐 가장 중요한 성질이었는데 정량적인 개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의 과학자들이 1600년경에 온도계를 발명했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론적인 연구를 한 결과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온도 개념을 수량적으로 제대로 정립해냈습니다. 그 수량화된 개념을 한국 등에서는 나중에 별 생각 없이 수입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수량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처음에는 수량이 아니었고, 어떤 식으로 수량화되었는지 그 과정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도는 당연히 수량이라고 생각하는데, 중세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속도가 수량이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란을 벌였습니다.(92-93p)

 

 

이것이 역설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인식과정입니다. 처음에 어떤 기준을 기반으로 탐구를 시작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기반으로 원래 채택했던 기준 자체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발달은 몇 단계에 걸쳐 계속될 수 있습니다. 감각을 넘어서게 해준 그 측정기구로 연구를 해서 지식을 더 쌓아 더 훌륭한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이용하여 측정기구를 수정하거나 더 훌륭한 새로운 측정기구를 만듭니다. 그렇게 개선된 측정기구가 생기면 또 개선된 연구를 하여 더 배우고, 드 새로운 지식을 이용해 또 측정기구를 개선합니다.

다시 시간 측정의 예로 돌아가봅시다. (1)사람들은 처음에 감각적으로 하루의 길이는 대략 일정하고 태양은 하늘을 일정한 속도로 가로지른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느낌을 기반으로 해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해시계가 잘 만들어지니까 거기에 의존해서 시간을 정의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하는 느낌 자체는 너무 주관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2)해시계를 기준으로 관측하면서 물리학·천문학 연구를 한 결과,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지동설을 거쳐 뉴튼역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튼역학을 기반으로 하면 추시계가 해시계보다 더 정확하고, 해시계가 대강은 맞지만 오차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오차를 계산해서 해시계를 수정했습니다. (3)추시계를 사용해서 많은 물리학 연구를 할 수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역학뿐 아니라 전자기학, 광학 등 여러 분야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시간 자체를 주제로 하지는 않지만, 정밀한 시간 측정 없이는 발달시키기 불가능했던 학문들입니다.

(...)

이러한 과학의 발달과정을 볼 때, 탐구를 하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과학에서 이런 식의 개선은 비일비재합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는 과정을 저는 「온도계의 철학」에서 '인식적 반복'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은 어떤 주어진 기준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측정기구는 그러한 기준의 중요한 한 예이고, 그 외에도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패러다임에 포함되어 받아들여진 연구방법이나 판단 기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진'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장에서 살펴보았듯,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개선할 수 있고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기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갖추어진 기준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탐구를 시작하여 결과가 잘 나오면, 그 탐구의 시발점이 된 기준도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의 기준을 수정하고 정제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물려받은 기준을 존중하고 사용하되 거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인식적 반복이란 처음에 믿고 시작한 전제들을 단순히 유지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 단계에서 재검토하며 지식을 쌓고 개선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통해 지식이 발달하는 과정을 좀 기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선의 형태입니다. 나선은 동그랗게 돌아서 계속 같은 점으로 돌아오는데 한 번 돌아올 때마다 더 높아집니다. 이것이 덧없는 순환논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관점이 '지식의 완벽한 정당화'라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높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나선이 그냥 원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옆에서 나선형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이 나선형의 발전형태를 원형의 순환 논리로 잘못 이해하고 저도 측정에 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그것도 보입니다.(114-117p)

 

 

과학은 그런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요? 어떤 사람이 정말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그 퍼즐을 푼다면 붕괴되어가던 기존의 정상과학 패러다임이 다시 소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퍼즐을 풀긴 풀었는데 기존의 패러다임에 전혀 맞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푸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해결할 조짐이 보이면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데, 그때 기존의 패러다임은 크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구 패러다임 간에 경합이 시작됩니다. 정치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많은 경우 내전을 하지요. 과학에서도 그렇게 내전이 일어납니다. 신출내기 패러다임이 그 내전에서 이기면 과학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혁명이 종료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또 다른 스타일의 정상과학이 시작됩니다. 또 그 새로운 정상과학도 조금 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변칙사례들을 만나게 되고, 위기를 맞고, 결국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됩니다. 쿤은 계속 끝없이 정상과학, 혁명, 정상과학, 혁명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과학사를 해석하고 과학의 미래도 그런 식으로 암묵적으로 예견했습니다. 이 반복된다는 개념이 재미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말의 '혁명'에는 그런 의미가 없지만 영어 단어 혁명에는 '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도는 것과 혁명이 무슨 상관일까요? 어원을 생각해보면 원래 혁명의 의미는 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돌고 또 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지듯이.

(...)

쿤의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비정합성'이라는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서로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느슨하게 표현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패러다임이 바뀌면 판단기준이 바뀝니다.

비정합성의 두 번째 차원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여러 가지 개념과 용어의 의미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비정합성의 세 번째 차원은 가장 심각합니다. 정말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부분인데요. 쿤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관측된 현상 자체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2장에서 논의했던 '관측의 이론적재성'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이론이 많이 바뀝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바뀌면 그 이론의 영향을 받는 관측내용도 바뀐다는 것입니다.(127-138p)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이 대두됩니다. 패러다임 간의 비정합성 때문에 과학의 객관성이나 중립성, 진실성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많이들 했고, 정말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장에서 쿤의 정상과학 개념 때문에 포퍼 등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고 이야기했는데, 과학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싸움입니다.

(...)

첫째, 이렇게 쿤이 말하는 식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면 과학적 지식이 축적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주어진 어떤 패러다임 안에서 지식이 축적된다는 것은 분명한데, 혁명이 일어나 그 패러다임 자체가 무너진다면 그 안에서 축적된 지식도 함께 없어져버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

둘째, 과학이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걱정이 생깁니다. 쿤은 과학지식 중에 가장 근본적이고 깊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일수록 뚜렷한 방향 없이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진리가 저 멀리에 있고,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우리가 지금은 여기쯤 있지만 노력을 통해 점점 진리에 다가간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쿤은 과학의 발전에 그런 식의 방향성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143-145p)

 

 

성공적인 이론도 나중에 폐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과학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과도 통합니다. 과소결정은 우리가 어떤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그와 부합되는 이론이 여러 가지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반프라센 식으로 말하면 주어진 그 증거를 가지고 볼 때 여러 이론이 다 경험적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여러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만족해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발견되면 그 이론을 따라가면서, 예전 이론은 싫고 틀렸다고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반실재론을 따르면 그렇게 과소결정에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습니다.(162p)

 

 

둥근 지구에 집을 짓는 새로운 비유의 이미지는 토대주의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인식론적 입장을 제시해줍니다. 또한 정합주의적 과학이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도 확실히 보여줍니다. 우선 생각해봅시다. 구형으로 된 지구가 실제로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을까요?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분명히 지구를 토대로 사용하고, '흙 토'자를 쓰는 '토대'라는 개념 자체가 지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지구란 전혀 어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광대한 우주의 진공 속을 떠다닙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노이랏의 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런 지구가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 지구는 큽니다. 우리 인간보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우리는 개미새끼처럼 그 표면에 붙어서 모든 일을 합니다. 또, 지구는 클 뿐 아니라 조밀합니다. 전통적 토대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견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상당히 딱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편에 서 있고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력입니다. 지구가 인간과 돌과 유리와 콘크리트 등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 표면에 붙어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구가 크고 딱딱하고 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토대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찾던 그런 절대적 기초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초가 없기 때문에 지식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과 확실성의 동일시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근대 서양 철학 전통의 큰 결함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만이 지식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실체를 냉정하게 보면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지식은 있습니다.

(...)

데카르트처럼 뭔가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를 떠나서, 인간이 실제로 태어나서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참 많습니다.

(...)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인식행위 자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당화한 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집 짓는 비유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지구에 집을 짓는 것이지 지구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 우주에서 제일 훌륭해서 여기다 짓는 것은 아닙니다. 화성에서 태어났다면 화성에 지었겠지요. 확실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을 미래의 지식을 쌓아올리는 토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199-201p)

 

 

요즘 은유를 논의하는 많은 사람들은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론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들은 이간의 모든 개념 체계에 속속들이 은유가 박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글자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할 때도 사실 많은 은유적 표현을, 은유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종종 씁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귀가 '어둡다'고 하는데, 이는 청각상태를 시각상태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누가 뭘 좀 이해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알아 '들었냐'고 하는데 이해가 꼭 귀로 들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팽배한 은유적 표현에는 문화적 차이도 확실히 있습니다. 영어에는 귀가 '어둡다'는 표현은 없고, 알아들었냐고 하는 말은 통상 '보이냐'고 묻습니다(Can you see? 또는 Do you see?).

공간적인 은유는 특히나 많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앞으로' 잘 하겠다고 합니다. 미래를 '앞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팽배한 은유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꼭 '앞으로'라는 은유를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미래를 뒤로 말하는 은유도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 '전'은 한문의 '앞 전' 자입니다. 그러니까 '전후'로 이야기할 때는 과거가 앞이고 미래가 뒤입니다. 순수한 우리말로도 손을 씻은 뒤에 밥을 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향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왠지 시간의 순서를 공간적 은유로 써서 표현하는 버릇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하면서도 더 이상한 예로 물건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들 수 있습니다. 온도도 '올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비싼 것과 위에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고, 가열하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더워지면 온도계 속의 액체가 팽창해서 유리관 속에서 올라가기 때문일까요? 석연치 않습니다. 요새 전광판에 표기되는 온도계는 숫자만 나오지, 뭐가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9장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더워질수록 온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작아지는 온도계도 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수량 자체를 '높다, 낮다'고 생각하는 은유입니다. '하나, 둘, 셋'하면서 더 많아지는 것과 공간적 위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365-366p)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우선 농담으로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지정된 주제가 '우리 집 강아지'였습니다. 그 주제로 어떤 학생이 써낸 글을 보고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거, 너희 누나가 낸 글과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똑같아. 그대로 베꼈지?"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한다는 말이 "아뇨, 같은 개거든요"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웃겠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실 실재와 과학이론의 관계에 대해 종종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든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결국 하나뿐인 우주이니까, 옳은 이론은 궁극적으로 단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380-381p)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워서 전 우주의 작동원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뉴튼의 꿈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훌륭한 뉴튼역학을 아주 팽개쳐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일상생활 범위부터 태양계 정도 스케일까지는 뉴튼역학을 아직도 잘 쓰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을 쓰고, 아주 커지면 일반상대론을 씁니다. 속도가 높아지면 특수상대론을 씁니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하겠지요ㅡ원칙적으로는 상대론적 양자역학 이론을 잘 세우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 있고, 다루는 대상이 복잡해질 때 계산하기가 힘들어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 하기는 쉽지만, 양자역학으로 로켓을 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이 진짜 진리냐 하는 생각을 떠나서 말이지요. 우리가 실제로 어떤 이론을 써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로켓을 쏘는 과학은 아직 뉴튼역학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391-392p)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전혀 입장이 다릅니다. 상대주의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너도 좋고, 네 말도 맞고, 난 상관없어'하는 태도인데, 다원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아무거나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의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자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402p)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장님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관측 불가능으로 남아 있는 무궁무진한 우주를 그래도 알고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바로 과학입니다.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자연히 겸허해집니다. 그런데 이 겸허한 태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들이라면, 장님이라도 여러 명을 동원해서 협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분업을 해서 다양한 다른 부분을 더듬고, 그렇게 해서 알아낸 내용을 서로 비교하고 토의해서 다듬어야 합니다.(407p)

 

 

 

ㅡ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中, 지식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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