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7
도입부에 편의상 제법 복잡한 가계도를 첨부해두었으나 읽으면서 이름이 헷갈려서 뒤적여 본 적은 없다. 소설 속에서 각 인물을 묘사하고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등장인물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구별시키는 것을 보며 이런 게 솜씨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스킬과는 별개로 이야기 자체가 재밌는지는 모르겠다.
부잣집 딸아이들을 위한 그 여학교들은 복종과 비겁함이 강제되는 곳이었고, 완전히 무지한 여자는 면하되 질문을 해 댈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을 만큼 가르치는 것이 그 학교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문화적인 광택을 입히는 것이 결혼 시장에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집단의 선을 위해 개인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훌륭한 가톨릭인이자 헌신적인 어머니, 순종적인 아내를 만든다는 목표를 의미했다. 수녀들은 먼저 허영과 다른 죄업들의 원천적인 우리의 육체를 통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웃거나 뛰어다니거나 실외에서 노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목욕할 때도 사방에 임하시는 하느님 눈에 우리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기다란 속옷을 입어야 했다.
(...)
우리는 하느님과 사탄과 어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우리의 손가락을 내리치는 손들과 벌 받을 때 꿇어앉는 자갈밭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스스로의 생각과 욕구들에 대해서도 겁을 내게 되었다. 우리가 자만심을 키우게 될까 봐 칭찬의 말을 하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고집을 꺾기 위해 벌주는 일은 넘치고도 남았다. 그 두터운 벽 안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이 머리 밑에 피가 날 정도로 팽팽히 머리를 땋아야 했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로 인해 손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공주처럼 귀여움 받는 생활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제아무리 사려 깊은 아이도 미치고 말 정도였다.(206-207p)
혁명군은 몇 달 전에는 정부군을 환호했던 바로 그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수도로 진격했다. 몇 시간 만에 산티아고 시민들은 팔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파면당한 발마세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공관의 한 방에서 거리의 시끄러운 소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인 내용의 유서를 작성한 후 가족들이 죗값을 치를 것을 두려워하며 이마에 권총을 쏘고 말았다.
(...)
한 발의 총탄으로 당장에 순교자가 되었고 그 후 몇 년간 자유와 민주의 상징이 되어, 가장 비웃었던 적들조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칠레는 기억력이 나쁜 나라인 것이다.(254-255p)
처음 시작은 이반 라도빅에게 보여 주었던 가족사진이었다. 후안 리베로 선생님의 말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습성 때문에 얼핏 봐서는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 인화지 위에 흑백으로 나타나 있었다. 틀림없는 몸의 언어들, 동작, 시선 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367p)
ㅡ 이사벨 아옌데, <세피아빛 초상>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