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8

 

 

친구 둘의 우정이 아닌 셋의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하다. 그 미묘한 감정의 역학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좀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단편이나 중편 분량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굳이 늘리고 늘렸다고 느낌.

 

 

아주 옛날부터 나는 내게 친구가 딱 두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운데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싶었다. 그건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친구들에게 너무 쩔쩔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친구 되기'가 가장 어려웠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니어도 선배에게 나는 친구일까? 함께 사진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해든에게 나는 친구일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아름다운 삼각형을 원하는 건 나만의 꿈일까. 언제나 삼각형을 상상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둘은 너무 적고 넷은 너무 많으니까. 나에게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었고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셋은 친구였다. 나는 둘이나 넷보다 언제나 셋만을 바라왔다.(23p)

 

 

내가 스스로 낸 상처들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고 가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엄마가 지닌 슬픔의 녹는점 중 하나가 나였던 것이다. 왜 그래 민아야····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다시 내 슬픔의 녹는점이 되고. 엄마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 때의 목소리, 빈정거리고 짜증낼 때의 목소리를 싫어했으나 가장 싫은 것은 슬픔을 녹인 것 같은 목소리를 낼 때였다. 떼어낸 마음이 금방 다시 돌아가 붙어버리니까. 엄마를 싫어하려고 애썼는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게 만드니까.

(...)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65-67p)

 

 

나는 민아 언니의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사람은 신기하게 한쪽에 성실해지면 다른 한쪽에도 성실해지기 쉬운지, 작은 인형을 붙들고 고민하는 동안 다시 카메라를 드는 일도 잦아졌다.(109p)

 

 

무엇보다 그들은, 셋이어서 좋았다. 길이 좁아서 가끔 삼각형으로 걸어야 할 때, 뒤처진 자리에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번갈아 뒤처졌다. 뒤처진 사람은 앞선 두 사람의 등을 보고 먼저 남겨진 발자국을 보며 기쁘게, 딴생각 없이 걸었다. 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172p)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아닌 적은 없었다.(200p)

 

 

 

ㅡ 김화진, <동경> 中, 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