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1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 엘바라는 작은 섬을 영지로 주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를 격퇴한 유럽의 제후와 황제들은 1814년 빈에서 회의를 열고 유럽을 다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판단에 따르면, 계몽주의 기본 원칙, 이른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이야말로 수차례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을 낳은 것이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온갖 무질서와 희생이 초래된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혁명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싶었다. 특히 메테르니히는 모든 것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다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정부나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쇄물이나 저작물을 금하는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버렸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했다. 이 새로운 루이왕은 26년에 걸친 혁명과 황제 시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불행한 죽음을 맞은 형과 다름없이 사치스럽고 몰지각한 궁정 생활을 했다.(353-354p)

 

 

 

 

ㅡ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中, 비룡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