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1

 

 

초반부 읽으면서 제목이랑 내용이 너무 안 어울려서 원제를 찾아보니 uncivilised. 그렇다면 책 내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게 이해가 간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 문명이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것 중 많은 부분이 거짓이며, 사실은 이런거라고 호들갑을 떨려면 뭔가 대단한 주장을 해야 할 거 아닌가. 프로이트 보고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하질 않나, 심리학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지도 않는 매슬로 욕구위계설이 대단한 뭔가고 그것에 너희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고 얘기하는 걸 읽으며 짜게 식는다. 아는 얘기만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과장하지 말고 담백하게 적어 보는 건 어떨지? 근래에 읽은 책 중에 눈에 띄게 별로다.

 

 

 

 

합리적 사고, 인류의 진보, 법 앞의 자유와 평등. 사랑하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전제들(전제인 동시에 약속이다)은 우리 사회의 핵심이요, 우리를 제자리에 묶어두고 붙들어두는 맹세이자, 우리를 통치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는 누구일까? 이런 얘기는 진짜일까? 믿을 수 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이 사실은 거짓말이라면,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런 이상 너머에서 서양 문명을 유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실마리는 '서양'이라는 말 속에, 그리고 서양과 비서양이 구분은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유럽의 작은 왕국에서, 북아메리카의 탁 트인 평원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나, 전 세계 소수 민족 거주지까지, 서양 문명의 심장부 곳곳을 살펴본다면, 이 모두가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명하다. 서양이란 바로 백인이 있는 곳이다.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리하여 유럽 바깥에, 그러니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정착형 식민지, 사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서구인 이곳들은 현재 서양의 문명 세계를 이루는 곳들이라 여겨지고 있다.

(...)

서양이 자칭 우세를 점하게 되면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지적으로 뒤처진 곳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커다란 '거짓말'이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후진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후진적인 사람들이며, 인류와 인류의 진보에 제대로 공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짓말'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서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비서구적이라 여겨지고 따라서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줄곧 여기 존재해왔다.(14-15p)

 

 

무엇이 문명화된 것이고 무엇이 미개한 것인지를 나누고 규정하는 프레임은 권력 게임의 승자가 결정한다.

(...)

문명화된 서구와 비문명적인 '타자'사이에 그어진 선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겠다고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를 얘기한다. 또,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특수한 시각에서 제외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며, 그렇게 제외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포함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를 담은 책이다.(18p)

 

 

1735년, '분류학의 아버지'라 알려진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는 중요한 저작인 「자연의 체계」를 발표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을 'Anthropomorpha'(인간 형상)라는 용어로 묶어 분류했으며, 인간을 다시 네 집단으로 나눴다. 바로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이었다. 린나이우스의 분류는 외양을 문화와 행동과 연관지었다. 예를 들어, 유럽인은 "예민하고, 창의적이고, 법에 따라 행동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고, 느긋하며, 변덕스럽게 행동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 사상의 선구적인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람의 책이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칼 린나이우스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었다.(35p)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98-99p)

 

 

블레어는 자신이 바라본 언어와 문화의 진보를 바탕으로 역사의 발전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었다. 원시, 고대, 그리고 현대였다. 블레어의 정의에 따르면, 원시적인 사람들은 문자가 없고 구어와 몸짓 언어에만 의존했다. 이 몸짓 언어는 북아메리카 일부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수어부터 지중해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폭넓은 제스처까지 광범위했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손으로 말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은 여기까지 거슬러가는 것 같다). 블레어는 언어를 도덕성과 인지 능력과 결부시켰다. 이에 따라 중국인, 이집트인, 히브리인, 그리스인, 로마인 같은 고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두 번째 단계에서는 문자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블레어가 명시적으로 밝힌 지도 지침이라기보다는,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암묵적인 논리에 가깝다. 자신만의 가정으로 뒷받침하는 주장인 것이다. 블레어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인, 그러니까 별로 놀라울 것도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현대 유럽인들은 구어와 문자 모두를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유럽인들이 인간의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언어가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질서가 뚜렷하기 때문이라며 말이다.(104-105p)

 

진짜 지 마음대로 생각하는구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오랫동안 '잉카 패러독스'라고 불렸다. 잉카가 그 어떤 것들을 기록하는 체계 없이도 건축, 공학 기술, 관료제와 같이 복잡한 필수 조건들을 모두 거느리고 문명을 건설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인류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한 소리처럼 들린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카에는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알고 있는 문자, 그러니까 종이에 쓰인 흔적은 없었지만, 매듭을 지은 실을 사용하는 '키푸'라는 고유한 기록 시스템이 있었따.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누군가 굳이 키푸에 관해 생각 해보기 전까지는, 키푸는 일반적으로 수르르 세거나 계산할 때 쓰는 기초적인 시스템이라 여겨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설형 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1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은 잉카의 키푸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여느 문자만큼이나 복합적인 기록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재료, 색깔, 가닥의 방향, 매듭의 방향이 이루는 수없이 많은 조합 방법이 서로 다른 소리와 모든 단어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으로 읽는, 표음문자와 그림문자가 혼합된 알파벳이었다.

(...)

연구자들이 큰 도약을 일궈내며 키푸를 해독하는 점은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왜 우리가 키푸를 간과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학자들은 무언가 발견할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로 키푸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만의 이미지 속에서 문명을 일굴 때면, 다른 문화에 있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희생되는 것 같다.(111-115p)

 

 

 

 

ㅡ 수바드라 다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中, 북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