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6

 

 

이 정도는 써야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 책에 깊게 영향을 받았다길래 분기학자에 대해서만 좀 더 찾아볼 요량으로 읽다가 그냥 휘리릭 다 읽음.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로 시작하여 분기학자의 등장으로 물고기라는 종이 사라지는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는 존재한다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마무리하는 책이다. 꽤나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지나치게 상세하다시피 분류학의 역사ㅡ칼 린나이우스, 다윈, 진화분류학,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분기학으로 이어지는ㅡ에 대해 훑어주는 책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저자가 움벨트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ㅡ어떤 부분이 걱정되는지는 알겠지만ㅡ하던데, 그 부분은 내 생각과는 좀 다르다.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 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각 종이 지닌 특수한 감각 및 인지 능력에 의해 키워지고, 그 종에게 결핍된 부분에 의해 제한된 결과 그 종이 특유하게 지니게 된 시각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 개념은 아주 익숙하다. 우리는 개들이 색깔을 볼 수 없어서 색채가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서 산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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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수님이 애지중지하던 벌들은 다면적인 구조의 눈으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벌들은 꽃에서 꿀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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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인간에게도 있다. 우리는 그걸 '실제'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우리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 게 바로 움벨트다. 그리고 거기에 답이 있었다.

인간의 움벨트에는 내내 드러나지 않고 있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들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생물의 체계적 질서를 감지하는 방식, 처음부터 내장돼 있으며 판에 박힌 그 방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로 움벨트(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라는 깨달음이었다.(35-36p)

 

 

나는 늘 분류학이라는 과학의 역사가 일련의 가지런하고 순차적인 통찰과 실험실의 야근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고, 또한 그런 것들이 모든 타당한 과학의 진보를 이끄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분류학은 철저한 이성에서 태어나 명쾌한 실험을 통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움벨트에서 받은 충동으로 태고부터 해왔던 일(생명의 질서 짓기와 이름 짓기)에서 파생된 과학이었다. 하지만 움벨트는 금세 분류학 분야의 크고도 끈질긴 약점이 되었다. 생명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토대가 되기에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움벨트와 과학은 왜 그렇게 철저히 상반되는 것일까? 움벨트는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인간 종이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이 걸어서 탐험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세계의 한 조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움벨트이니, 전체 지구의 종들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의 과학자가 해야 하는 일에는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방해가 된다. 그리고 움벨트는 생명과 자연의 질서를 명쾌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각은 객관성이나 기나긴 세월에 걸친 진화적 변화, 과학적 엄밀함이나 가설 검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알지도 못한다. 사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진화적 생물 분류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움벨트는 철저하게 감각적이며 극도로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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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움벨트는 그간 보이지 않았고 인지되지 않았던 과학의 적수였고, 맞서 싸우기에 더없이 힘겨운 상대였다. 어찌나 버거운 적수였는지 그 때문에 분류학자들은 그 싸움을 2세기가 넘도록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이 승리를 거두었고, 움벨트를 내버리고생명에 대한 그 비과학적이고 비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탈출했다.

(...)

어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기학자들의 선언은 단순히 분류학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선언은 과학이 움벨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최종적으로 폐기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분류의 과학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그 태곳적에 지각된 시각(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던 시각!)에 대해 진화와 과학의 관점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마침내 이뤄낸 승리였다. 분기학자들의 손에 어류가 죽어나간 그 일은 분류학이 진정으로 현대적인 과학으로 태어나는 순간으로 기록됐다.(38-39p)

 

 

해야 할 분류 작업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 과학자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더 수월하겠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의 생명에게 눈길도 주지 않게 됐다. 수많은 야생의 생물들이 자기 좀 보라는 듯 눈에 띄는 모습으로 끈덕지게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 우리는 그 존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모두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일 가운데 우리가 생명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일, 바로 '먹기'를 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사실은 생명의 세계임을 점점 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고기가 콧김을 뿜어대는 덩치 큰 포유동물에서 잘라낸 살덩어리가 아니라 스티로폼 접시에 놓인 새빨간 타원형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세계는 항상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만 우리는 그걸 모두 놓치고 있다.

우리가 치를 대가는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심지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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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그리고 이 지경에 와 있음을 깨달은 지금, 어떻게 여기서 탈출해야 할까? 이 책은 이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다. 이 책에는 우리가(과학자들과 나머지 사람들 모두)이 낯선 장소에 도달한 여정의 이야기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지도가 담겨 있다.

우선 나는 내 물고기들을 되찾고 싶다. 알고 보니 나는 뱀들과 새들과 물방울을 튕기는 매혹적인 물고기들로 가득한 세계를 내게 보여줬던 유년기의 숲에서 마음껏 활개 치는 움벨트와 함께하던 그 시절, 처음부터 올바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비록 과학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는 물고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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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끌미끌하고 반짝거리며 물속을 헤엄치는 그 동물들은 우리와 생명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심점에 자리하고 있다.(44-45p)

 

 

칼 린나이우스 무대에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동물과 식물은 사람들이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이치에 맞는 존재들이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만나는 생명의 세계에서 쉬이 질서를 목격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질서를 찾아주는 열쇠는 기분 좋을 정도로 단순했다. 우리 인간 종의 역사 대부분에 걸친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들 대부분은 그리 먼 거리를 여행할 일이 없었고 따라서 볼 수 있는 생물의 종류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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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생물의 범위는 어느 한도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경이롭지만 단순하고 지리상으로 엄격히 제한된 세계에는 깊이 생각해볼만한 생물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기서 지극히 타당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질서를 찾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특징을 쉽게 묘사할 수 있는 부류들은 척 봐도 정체가 뭔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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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단순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세기 초, 린나이우스가 살던 시절에 이르자 유럽의 범선들은 이제 미지의 세계 가장자리만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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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모험심 넘치는 식물학자와 동물학자는 범선에 올라 지구 전역을 누비고, 온갖 생명이 바글대는 열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이국적인 야생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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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00종의 동물이나 550종의 식물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꼬리를 물고 해안에 당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물이라는 파도가 그들 앞에 수천 종의 동식물이라는 현실을 들이밀었다.

이 모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열광이 커지는 한편으로 혼란도 커져갔다.(50-54p)

 

 

린나이우스는 겸손과는 심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자주 들먹이고 자화자찬했던) 자신의 재능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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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나이우스는 전능한 신이 창조의 날 이후 전혀 변하지 않은 무수한 생명 형태들에 관해 그 누구보다 큰 통찰력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칼 린나이우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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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나이우스는 여러 면에서 현대의 과학자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

그는 속속들이 감각적인 사람으로 아름다움과 경이, 세상의 찬란함과 비참함에 탐닉했으며, 멜로드라마적 취향이 다분하고 극단적인 관점을 좋아했다.(77-78p)

 

 

자기 입으로 그렇게 부단히 자화자찬해댄 그를 칭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의 체계」는 정말로 굉장한 성취였다. 린나이우스는 이십 대 백수 시절에 그 책을 씀으로써, 자기 힘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자연의 체계」를 씀으로써 그는 이제 막 생겨나던 분류학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했다.(83p)

 

 

생명의 세계에 대한 린나이우스의 비전은(다른 모든 이의 비전도 마찬가지로) 불변의 생물들로 가득한 세상의 비전이었다. 생물 종은 누구나 알고 있듯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다윈이 따개비의 도움을 받아 진화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상에 충격을 가할 참이었다. 그럼으로써 다윈은 수많은 사람이 생명의 세계와 단절되고 물고기는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많은 일이 펼쳐질 무대를 마련하게 될 터였다.(86-87p)

 

 

린나이우스의 시대 이후 분류학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린나이우스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고서 모든 생물에 대한 전문성을 주장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수집가들은 신속하게 작업을 이어갔고, 그 결과 이제는 생명의 세계가 그러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태였다.

(...)

각자 특정하고 한정된 분류군의 전문가인 이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생물의 작은 소집단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여러 생애에 걸쳐 전념해도 충분치 않을 만큼 막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물학자와 동물학자만이 아니라 이제는 수십 가지 전문분야가 존재했다.(91-92p)

 

 

그는 변이가 진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그를 완전히 꼼짝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생명이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깔끔한 틀과 범주에 들어가는 걸 얼마나 거부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진실을 알아봄으로써 다윈은 자기도 모르게 분류학을 거의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단 진화론자의 눈으로 생명을 보기 시작하여 그 모든 혼란스러운 변이들과 그 모든 진화적 변화의 시초를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종에 대한 시각도 바뀐다. 생명은 단순히 가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이든 우리에게 보이는 건 흐르는 식산 속의 스냅숏 한 컵, 그 계통이 새로운 종들로 갈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장한 변화의 흐름 속 한순간일 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건 당신이 위대한 진화적 통찰을 얻은 쾌거다. 유일한 문제는 이제부터는 생명의 세계를 분류할 방법을 도저히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112p)

 

 

이렇게 서로 매우 유사해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의 질서에서 서로 나란히 두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둘은 진화적으로 상당히 먼 친척들이라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반대로 모습이 서로 매우 다르고 따라서 우리 감각으로는 자연 질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유기체가 진화적 생명의 나무에서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예컨대 둘 다 갑각류인 따개비와 바닷가재가 그렇다. 자연에는 우리가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것이 진화적 생명 분류와 완전히 충돌하는 예들이 가득하다.(119p)

 

 

그러니 세분-병합의 딜레마를 우리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펴보자.

(...)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코카콜라와 세븐업, 미스터핍, 시에라미스트, 펩시콜라, 닥터페터, 오렌지크러시, A&W 루트비어, 스프라이트, 프레스카를 한 캔씩 주고, 유형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해보라고 요구한다고 하자. 세분화 경향이 있는 우리의 도시인은 이 음료들을 맛보고 곧바로 알아차리고, 명백한 상태까지 살펴본 뒤, 아마 자기가 보기에 너무나 뻔히 구별되는 범주들로 분류할 것이다. 이 사람은 탄산수의 10가지 유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좀 더 병합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에게 묻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하나하나 조금씩 마셔보고 상표를 살펴본 다음 10가지 음료를 10가지 범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4개의 그룹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포함하는 콜라 그룹, 시에라미스트와 세븐업, 스프라이트, 프레스카를 포함하는 레몬라임 그룹, 미스터핍과 닥터페터, A&W 루트비어를 포함하는 갈색 비콜라 그룹, 그리고 오렌지크러시 하나만 들어가는 오렌지탄산수 그룹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류를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잠깐, 시에라미스트와 세븐업, 스프라이트는 셋 다 맛이 같지만 프레스카는 상당히 달라. 프레스카는 따로 떼어서 혼자만의 다섯째 그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는...

(...)

"그냥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리하는 게 더 성향에 맞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데 모으는 게 더 맞는 것이다."(142-143p)

 

 

소칼이 반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가중치 조정 과정이었다. 그는 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으며, 이 행복한 무지 속에서, 직관이 장악한 이 단계를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건너뛸 수 있었다. 소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들이었고, 97개 종 각각에서 122가지 형질을 단 하나의 숫자로 기술한 이 수는 무려 총 11,834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렬을 구성했다. 이 분류학적 구성에서 모든 형질은 똑같은 크기의 영향력을 지닌다. 각 형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되든 상관없이, 가장 많은 수의 유사성을 공유한 종들은 함께 모여 동일한 속에 들어갈 터였다. 두 종이 공유하는 유사성이 적을수록 이 분류에서 그 종들은 더 먼 거리에 배치될 것이었다. 계산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형질에게 완전히 평평한 운동장이 펼쳐질 것이고, 그 결과로 어떤 나무가 만들어지든 그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반적인 유사성만을 기반으로 한 나무일 터였다.(282p)

 

 

분자들을 비교하면 ( 한 유기체의 다른 어떤 특징과도 달리) 바다에 사는 의충동물과 돼지처럼 전혀 다른 동물들을 포함해 어떤 두 생물도 비교 연구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인 단백질은 영장류나 다양한 동물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분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유기체들의 분류학 연구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무리의 야생화들에서 자연적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꽃의 구조와 잎의 특징 등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그러나 야생화 한 종을 말코손바닥사슴과 어떤 박테리아와 비교할 방법은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것들이 상당히 거리가 먼 관계로 보인다는 주장을 하는 정도가 다였다. 비교할 만한 부분이나 조각, 토막이 전혀 없었고, 명백히 유사하거나 다른 점도 없어서, 그것들 사이 관계의 세부적인 사항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모든 유기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백질들을 가지고 작업함으로써 이 화학자들은 모든 생물의 질서를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307-308p)

 

 

분류학은 처음부터 항상 외양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자들의 성공으로 과학자들은 사실상 분류학자들에게 생물의 외양은 무시해도 되며 오히려 무시하는 게 좋겠다고, 이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단백질과 DNA뿐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나머지 과학자 공동체의 다수가 분자생물학자들이 마침내 생명을 분류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열광하고 있었다.(312p)

 

 

전통 분류학은 1970년대가 끝나가던 무렵 이미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수리분류학자들은 분류학 전반을 폭풍처럼 휩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주장하는 객관성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 통계학에 대한 집요한 숭배를 품은 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분자생물학자들 쪽에서는 만만찮은 추진력을 얻으며 무서운 속도로 세를 불려갔다. 바로 이 괴로운 시절에, 젊은 무뢰한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자들이 나타나 자기들 특유의 새로운 대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리분류학이 현대 과학으로서 분류학의 유아기였다면, 그리고 분자분류학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향해 비틀비틀 첫걸음을 내디디며 신기함과 놀라움을 채워가던 유년기였다면, 가장 최근에 등장한 이 불행은 분류학의 청소년기였을 것이다. 누구나 알 듯이 청소년기는 항상 어여쁘지만은 않다. 이 시기는 분류학이 삐딱함을 장착하고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밀고 군데군데 피어싱도 하고 엄마 아빠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분기학자라고 불리게 될 이들, (...) 그들은 다가오고 있었다.(331-332p)

 

 

헤니히는 진화분류학자들과 달리 어떤 경우에도 유기체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이나 차이점이 더 혹은 덜 중요할지를 감지하는 데 직관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수리분류학자들과 달리, 얻을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유사성과 차이점의 방대한 통계분석에 의지해 미묘한 관계와 분기의 진실을 완력으로 뽑아내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가 책을 쓰던 당시 DNA는 아직 완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으니 DNA를 사용할 생각도 분명 없었다.

모든 분류학자가 그렇듯 헤니히도 진정한 생명 진화의 계통수를 향한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유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역사상 다른 모든 분류학자와 달랐던 것은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유사성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유사한 분류군들, 다시 말해 특정 종의 공통 후손들을 식별하려면, 다른 어떤 분류군도 아닌 그 후손들만이 특유하게 공유하는 유사성들을 밝혀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아가 그들이 공유하는 유사성은 정확히 한 유형, 바로 그 공통 조상에게서 새로 진화되어 그들에게 유전된 새롭고 특유한 형질이리라는 점도 깨달았다. 이 유사성은 그 공통 후손들 모두에게 회원식별용 배지 같은 역할을 할 터였다. 각각의 특정 계통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진화상의 새로움을 보면 친척 분류군 전체를 식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헤니히의 머리에서 나온 독창적인 생각이었다. 공통된 진화상의 참신함만을 가지고 진화상의 친척 분류군들을 식별하라는 것.(334-335p)

 

 

분기학자들의 나라에서는 상황이 더 기괴해진다. 헤니히가 온전한 후손들의 분류군만을 인정하고 명명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자.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화의 나무에서 온전한 가지 전체만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나무를 살펴보면 작은 문제 하나가, 검고 흰 얼룩이 있고 음메 하고 소리를 내는 문제가 보인다. 소들이 우리의 물고기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만약 당신이 모든 물고기가 포함된 가지를 쳐낸다면 소도 함께 딸려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소를 떼어낼 수 없다. 가지를 두 번 쳐서 당신 마음에 맞게 불완전한 무리 짓기를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가 어류라고 부르는 것은 헤니히의 기준에 따르면 진정한 진화적 분류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고기들은 한 조상의 모든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다. 거기에 소를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어류는 '진짜 분류군'이 아니다. 이 말은 폐어나 잉어나 연어 같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분기학자들의 기준에서도 다른 기준에서도 정말로 실재한다. 당신은 가지를 하나만 잘라서 폐어만 있는 가지를 가질 수도 있고, 연어만 있는 가지 하나만 잘라낼 수도 있다. 분기학자들이 인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모든 물고기를 하나의 분류군으로 묶는 것이다. 혹은 그들이 하는 말로는, 당신이 정말로 폐어와 연어와 잉어 등등을 '어류'라는 하나의 분류군에 모아 넣고 싶다면, 그 분류군에 그들과 조상을 공유하는 모든 후손도 함께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베시도 들어가고 오리어리 부인도 들어가며, 지구상의 모든 소도 들어간다.

소만 포함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어류'라 불리는 이 분류군을 유지하고 싶다면, 거기에 모든 포유동물도, 심지어 인간도 포함시켜야 할 터이다.

(...)

이렇게 된 사정이었다. 물고기들의 죽음은. 다윈이 분류학은 생명의 계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시동을 건 일의 필연적인 결과. 그가 우리에게 감지된 자연의 질서 저변에 거대한 생명의 나무가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생명은 정말로 진화한다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과학이 피할 수 없이 달려온 지점. 다윈이 방향을 알려주었고, 이제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352-355p)

 

그만해 아니 계속해. 분류학자들 울겠다...

 

 

 

 

ㅡ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中,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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