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5
주변에서 예전부터 좋다고 해서 내심 기대가 컸는데 실망스럽다. 잘 읽히는 것만 동의.
난 이제 더 이상 서양 백인 남성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여정을 떠나고 그 끝에 무언가에 도달하는 서사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종착지가 인도라니. 아이고 뻔해라. 대저 서양 백인 남성에게 동양의 인도란 어떤 의미인지?
그런 추세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야. 3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는데 말이야, 지위나 재산, 주변 조건 등을 적당히 고려해서 결혼하는 것이 사랑만 가지고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법이야. 세상에서 유일한 문명국인 프랑스에 살고 있다면 말이지, 이사벨은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레이와 결혼 할걸. 그리고 한 1~2년쯤 지나고 나면 이사벨은 래리를 애인으로 삼을 거고, 그레이는 유명한 여배우 하나쯤 호화로운 아파트에 들어앉히게 되겠지. 그러면 모두 나름대로 행복해지지.(54p)
나의 결점 가운데 하나는, 못생긴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것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친구라 해도, 또 아무리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 온 사람이라 해도 그의 치아가 고르지 못하거나 코가 비뚤어져 있으면 나는 기분이 불편해진다. 반면 용모가 아름다우면 함께 있는 내내 즐겁고, 20년 동안 알고 지내며 잘생긴 눈썹과 균형 잡힌 얼굴 윤곽을 늘 보아 왔더라도 여전히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236p)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281p)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347-348p)
ㅡ 서머싯 몸, <면도날>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