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9
그때는 그런 게 날 행복하게 해줬다.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데, 나이가 드는 건 일상의 행복을 느끼는 마음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치 당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인슐린 저항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이미 너무 많은 경험을 한 탓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행복 저항선이 높아져버린달까?(8p)
그래도 이 책을 쓰기 위해 밤마다 새로운 드라마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재미있는 시리즈를 많이 발견했는데, <더 나이트 오브>는 이제 한국에서는 볼 수가 없어져서 아쉽다. <하우스>의 휴로리를 좋아한다면 <로드킬>을 추천한다. <부통령이 필요해>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제작진이 그 이전에 영국에서 만든 <더 씩 오브 잇>을 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것이다. <더 오피스>나 <팍스 앤드 레크레이션>을 좋아한다면 <시트 크릭>을 추천하고 싶다. 영국 의료보험의 명암을 다룬, 벤 위쇼 주연의 <조금 따끔할 겁니다>도 무척 재밌다). 소설이 그렇듯, 세상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그건 정말 좋은 일이다.(20-21p)
삶의 실패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때때로 사람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저지른 삶의 실수(실패)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일종의 성공적인 삶(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를, 좌절을, 고통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고. 하지만 때때로 그런 궁금증이 든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 실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성공의 어머니가 되지 못한 실패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실패는 그저 실패, 고통은 그저 고통, 잘못된 선택은 그저 잘못된 선택이라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침대에 충분히, 정말로 충분히 머무는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침대에 머문 뒤 몸을 일으켜 빠져나갈 만큼의 힘을 얻었을 때 비로소 우리 역시 캐런처럼, 단 하나의 벽돌을 제거하고 거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돌멩이 같은 실패를 슬쩍 바라보는 용기를 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36-37p)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 당시 팸과 짐의 선택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거야? 같은 식으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의 선택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짐과 팸이 그리고 내가, 우리가 다른 식의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닐까 하는.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는 있다. 아,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44-45p)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세계는 다르다. 아무리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 일의 진짜 의미를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브레이킹 배드>는 매끈하지 않은, 비합리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무언가를 남겨놓는다.
(...)
나는 이 드라마를 보다가 이렇게 메모했다.
"불행이 닥친 후,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조금 더 복잡한 경로를 지나야 한다. "불행이 닥친 후, 우리가 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 자신이다."(132-133p)
ㅡ 손보미, <아무튼, 미드> 中, 제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