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9

 

 

작가 이름 좀 통일해. 이게 뭐야.

 

 

특히 도시빈민 최후의 피난처라 불리는 쪽방의 역사는 미국에서 슬럼을 착취해온 역사와 닮았다. 서울 등 대도시의 쪽방은 감옥보다 좁고 열악하나, 건물주들은 노숙 외에 대안이 없는 세입자들의 처지를 악용해 (평당 기준으로) 일바 아파트보다 훨씬 비싼 임대료를 현금으로 챙긴다. 정부나 기업의 쪽방 리모델링 사업은 임대업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받는 주거급여가 인상되면 임대료도 동반 상승했다.(23p)

 

 

가난에 대한 책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일 때가 많다. 100년 넘게 이런 식이었다. 1890년 제이컵 리스는 뉴욕의 세입자들이 처한 혹독한 환경을 기록하고 골목에서 잠든 꼬질꼬질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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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내세운 이런 책들은 우리가 가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왜?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 대답할 수 없다. 미국에는 왜 이 모든 가난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 질문은 다른 접근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난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 너머를 들여다봐야 한다. 특권과 풍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ㅡ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 집이 있고 대학을 나온 사람들, 보호받고 운이 좋은 사람들ㅡ가 이 모든 불필요한 시련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이 "우리"를 중심에 놓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나의 시도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가난에 대한 책이지만 가난한 사람들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가난하지 않은 반대편 절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어떤 이들의 삶을 살찌우기 위해 어떻게 다른 이들의 삶을 위축시키는지에 대한 책이다.(38-40p)

 

 

크리스털, 그리고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물론 돈 문제이지만 온갖 문제들이 가차 없이 눈동이처럼 커지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은 통증, 육체적 통증이다. 몸을 굽혀서 노인과 환자를 침상과 변기에서 들어 올려야 하는 재택 간병인과 공인 간호조무사에게는 허리통증으로 체감된다. 우리의 주문을 받고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 동안 서 있어야 하는 계산원들에게는 발과 무릎의 고통으로 체감된다. 암모니아와 트리클로산이 들어 있는 제품으로 우리의 사무실 건물, 집,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청소원들에게는 피부발진과 편두통으로 체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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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런데 사회는 그걸 치료하는데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에 대처할 때가 많다. 내 친구 스콧은 어릴 때 성폭력을 당했다. 성인이 된 그는 알약들을, 그 다음에는 펜타닐을 발견했다. 그는 한 번에 20달러를 내고 평화를 구입했다. 40대가 된 그는 약을 끊고 몇 년을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약에 빠져서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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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통증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동안 임차인들의 소득은 하락했지마 임대료는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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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선 이하인 임대주택 가정 대부분은 최소한 소득의 절반을 주택비로 지출하고, 네 곳 중 한 곳은 임대료와 공과금에만 소득의 70퍼센트 이상을 지출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치면서 미국은 저소득 임차인들이 퇴거를 비일비재하게 겪는 나라가 됐다. 아비규환이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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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끊임없는 두려움이다. 미국인의 3분의 1은 버스 운전사, 농부, 교사, 계산원, 요리사, 간호사, 경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이렇다 할 만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직도 많은 이가 "빈민"으로 공식 집계되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마이애미나 포틀랜드에서 1년에 5만 다러로 두 아이를 키우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택바우처를 받을 자격은 안 되지만 주택담보대출도 받을 수 없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임대료가 월급의 절반을 가져가 버리고, 학자금대출을 갚느라 월급의 4분의 1을 써야 하는 상황은? 어떤 달엔 빈곤선 저 아래로 추락했다가 다음 달에는 뭐가 더 나아졌다는 느낌도 없이 그 위로 조금 올라갈 때는? 실제 현실에서는 빈곤선 위에도 숱한 가난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훨씬 아래에도 많은 가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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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국가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인은 열여덟 명 중 한 명꼴로 "지독한 빈곤"속에 살고 있다. 이는 지면을 파고들어 가는 수준의 결핍을 말한다. 빈곤선의 절반 이하에 해당하면 지독한 빈곤으로 간주한다. 2020년에는 이 지독한 빈곤의 기준선이 1인의 경우 연간 6380달러, 4인 가족의 경우 1만 3100달러였다. 그해에 미국인 약 1800만 명이 이 조건 밑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미국에서 지독한 빈곤을 겪는 어린이는 500만 명 이상으로 그 비중이 다른 어떤 선진국 보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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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당혹감과 수치심을 일으킨다. 과거 프랑스 사회학자 외젠 뷔레는 비참함은 "가난이 안긴 도덕적 감정"이라고 말했다. 한나절을 기다렸는데 당신이 등장하자 짜증을 부리는 사회복지사와는 10분짜리 면담을 하는 게 고작인 복지 사무소의 새로울 것도 없는 수모 대행진 속에서,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창문에는 금이 가고 찬장에는 바퀴벌레가 버글대는데 집주인은 그 책임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아파트로 귀가할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손쉽게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대중음악과 아동 도서에서 누락되는지를 볼 때, 그리고 이런 말소가 당신이 더 넓은 사회와는 무관한 사람임을 상기시킬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사위가 적막해지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거짓말을 믿기 시작할는지 모른다. 당신은 공공장소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믿고 공원과 해변을, 쇼핑 지구와 스포트 경기장을 피한다. 가난은 당신의 삶을 소진시킬 수 있지만, 가난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파산했다고 털어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신질환을 고백하는 게 사회적으로 더 용납받을 만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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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쪼그라든 삶과 인성이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당신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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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앞에선 누구든, 결핍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무분별해 보이는, 심지어는 명백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병원 대합실에서 시계를 쳐다보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응급실 앞에 붙들려 있다 보면 다른 모든 걱정과 책임은 사소하게 느껴진다(실제로도 그렇다). 이런 경험은 가난한 삶과도 비슷하다. 행동과학자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섀퍼는 이것은 "대역폭 세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가난함은 밤을 꼬박 새우는 것보다 사람의 인지능력을 더욱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가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안정과 안락만 박탈하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 역시 앗아 간다.

하지만 가난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인종적 약점 때문에 심해지거나 인종적 특권 때문에 약화될 수도 있다. 흑인의 가난, 히스패닉의 가난, 미국 선주민의 가난, 아시아계 미국인의 가난, 백인의 가난은 모두가 다르다. 흑인과 히스패닉계 미국인은 백인 미국인에 비해 가난할 가능성이 두 배 높다. 켜켜이 누적된 인종적 유산도 문제지만 오늘날의 차별 역시 무시 못 할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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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물질적 결핍과, 만성통증과, 투옥과, 우우증과, 중독 등등이 겹겹이 누적된 형태일 때가 많다. 가난은 직선이 아니다. 사회적 병폐들이 단단하게 엉킨 매듭이다. 가난은 범죄, 건강, 교육, 주택 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사회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은 수백만 가정이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안전과 안정, 품위를 거부당한다는 뜻이다.(49-62p)

 

 

하지만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고 해서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40년 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핸드폰을 살 수 있었지만 지난 몇십 년을 지나며 핸드폰 가격은 전보다 감당할 만해졌고, 이제는 많은 빈민을 포함해서 미국인 대부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점차 핸드폰이 일자리, 주택, 연인을 찾는 데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관찰자들은 "일부 소비재에 대한 접근은 가난한 사람이 어쨌든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핸드폰은 먹을 수 없다. 핸드폰을 생활임금과 맞바꿀 수도 없다. 핸드폰은 안정된 주택, 적정가격의 의료서비스, 적합한 양육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사실 핸드폰과 세탁기 같은 물건의 가격이 떨어지는 동안 생필품 중에서도 의료비와 임대료 같은 가장 필수적인 항목들의 가격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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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해링턴이 60년 전에 표현한 대로 "미국에서는 괜찮은 집에 살거나 괜찮은 음식을 먹거나 괜찮은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괜찮은 옷차림을 하는 게 훨씬 쉽다".(66-67p)

 

 

미국에서는 결혼이 사치품 비슷한 것이 됐다. 결혼은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결혼 관문"을 넘지 못하면 결혼의 연을 맺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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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보유는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더 큰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된다. 보통은 자신이나 부모가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에야 집을 살 수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이미 안정된 사람들의 안정을 더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양친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부르주아적 모델은 부르주아를 만들어 낸 바로 그 물건,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실제적인 경제 기회를 가난한 미국인들에게 확대할 경우 결혼은 보통 자연스럽게 뒤따른다.(81-83p)

 

 

이주나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빈곤에 대한 다양한 설명 방식들의 장점을 평가하는 것은 유용한 훈련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다 보면 언제나 다른 모든 곁뿌리들의 근원인 중앙의 원뿌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그 원뿌리란 바로 가난이 상처이고 고난이라는 단순한 진실이다. 수천만 미국인이 가난해진 것은 역사의 실수나 개인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다.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그걸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86p)

 

 

우리는 보통 가난이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책임 소재를 흐리는 이론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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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빈곤을 설명하는 인기 있는 이론으로는 공장폐쇄와 그 주변 지역공동체의 황폐화를 유발한 탈산업화가 있다. "탈산업화"라니 이런 유체 이탈 화법이 또 있을까. 이 표현은 마치 숲이 나무좀의 공격을 받듯 미국에서 탈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인상을 준다. 이런 화법에서 가난은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원인의 부산물"이다. "누구도 이 재난을 의도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 누구도 여기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환경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면 의도적으로 설계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 차원의"문제들ㅡ시스템 차원의 인종주의, 빈곤, 여성혐오ㅡ은 결국 현실적이든 관념상이든 자기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조용히 내려진 숱한 개별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웨이터에게 팁을 주지 않거나, 우리 동네에 저렴한 주택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투표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온갖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보다 명백한 사회적 진실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면 긴장감이 가득해진다. 그걸 거론한 삶은 무례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조용히 시키려 할 것이다. 마치 공공장소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무언가를 지적하는 어린이를 어머니가 쉿 하며 조용히 시키려 하듯, 또는 유리창에 던져진 벽돌처럼 난폭할 정도로 선명하고 깊은 도덕적 진실을 헤집는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들먹이는 청년을 진지한 어른들이 조용히 시키려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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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애 일어난 착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토론할 수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쥐어짜고 있는가로 대화가 넘어가면 자꾸 버벅대며 난감해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아마 우리가 매우 화가 나고 극단적인 형태의 착취만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나, 광산에 보내진 어린 소년들이나,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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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노동자들이 그런 노동조건을 스스로 선택했을까? 성인일 때 이주했다면 그렇다, 자신들이 선택한 게 맞다. 하지만 절박한 삶들이 착취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걸 찾아 나선다고 해서 그 조건이 착취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더욱 들썩인다.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사회문제 대부분이 복잡하지만 복잡함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은 비판적 지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사회적 지위의 반영에 더 가깝다. 배고픈 사람들은 빵을 원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전문가 집단을 불러 모은다. 복잡함은 강자의 피신처다.(89-93p)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더 좋은 일자리를 얻어라. 아이를 그만 낳아라. 돈 문제에 대해 더 똑똑한 결정을 내려라. 하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다. 더 나은 선택의 발판은 경제적 안정이다.(117-118p)

 

 

 

 

 

ㅡ 매슈 데즈먼드, <미국이 만든 가난>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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