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3
혹시라도 이 책이 문제 있는 예술가의 창작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길 내심 기대했지만 역시나 그런 건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어떤 책이나 글에서도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일관성 있는 해결책을 찾는 건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마이클 슈어도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지 않았나.
지난 20년간 소장해온 DVD로 <애니 홀>을 본다고 해서 우디 앨런에게 새로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최신 영화 티켓을 사서 앨런의 주머니에 새로 돈을 넣는 것도 아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을 보기로 한 결정을 자각하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큰 의미였고 내 삶과 작가로서의 경력에 직접 공헌한 영화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에 주의를 기울여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어떤 것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동시에 아래 두 가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1. 나는 이것이 좋다.
2.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문제가 많다.
1번을 잊으면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잃고 만다. 2번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초래한 분노를 부정하는 셈이며 끔찍한 행동의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
아무리 좋아해도 더는 소비할 수 없을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 예술가의 행동이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무 추하고 고약해 몰래라도 더 이상은 그를 지지하는 데 시간과 돈을 쓸 수 없을 때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어쩔 도리 없을 만큼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면, 위의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잘 간직함으로써 그것과 내가 연결된 모든 끈을 잘라내는 고통없이 여전히 자기 수양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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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해답은 없다. 철학을 논할 때 ‘휴리스틱’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다. 휴리스틱은 문제를 제공해 해결책을 찾게 하는 일종의 도구로 행동 지침이 되는 경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예술을 예술가에게서 분리할 수 있는가’라거나 ‘아기 기린 목을 조르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소유한 스포츠팀을 응원해도 될까’같은 질문에는 휴리스틱을 활용한 대답이 불가능하다. 이 모든 상황에 윤리 이론을 적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어떤 때는 그저 행동해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삶에서 ‘이것’과 ‘이 사람’은 떨쳐내야 하지만 ‘저것’은 그냥 둬도 괜찮다고 하는 결정은 단지 우리 자신의 추론과 본능적 판단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흔히 “어디다 선을 그어야 하지?”하고 물으며 마치 사안의 모호함을 지적하기만 하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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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선을 긋자. 사람마다 다른 위치에 선을 그을 수 있지만 각자 서로를 위해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을 긋는 순간 모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 분명하다. 두 예술가의 행동이 얼추 비슷한데도 이 사람은 계속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떨쳐내는 탓이다. 당신 친구들은 방방 뛰고 웃으면서 왜 이 영화는 보면서 저 영화는 안 되는지, 왜 이 야구 선수는 응원하면서 저 선수는 비난하는지 지적해댈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전체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감각’인 도덕적 완결성을 이뤄가는 작업을 그만두면 안 된다. 모순을 발견하면 되돌아가 더욱 파헤치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필요하면 처음 그은 선을 지우고 다른 곳에 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ㅡ 마이클 슈어,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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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10일ㅡ나는 지금 이 날짜를 외워서 쓰고 있다ㅡ로만 폴란스키는 서맨사 게일리를 자기 친구 잭 니컬슨의 할리우드 힐스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서맨사를 자쿠지로 데리고 가 옷을 벗게 한 다음 퀘일루드를 먹였다. 잠시 후 그는 서맨사가 앉아 있던 소파로 가서 그녀의 질에 삽입을 하고 그녀의 몸을 뒤집어 항문에 삽입을 한 후에 사정했다.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종합한 후 매우 단순한 사실 하나만이 남겨졌다. 열세 살 소녀가 항문 강간을 당함.
그러나 여기서 잠깐. 나는 폴란스키의 중죄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작품을 소비할 수 있었다. 아니 소비하고 싶었다. 2014년 봄과 여름에 그의 영화 몇 편을 보았고, 그 작품 자체의 미학에 몰두한 나머지 그의 범죄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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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부터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풀어 보자.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인간을 사랑하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의식 있는 소비자이자 바람직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예술이라는 세계의 시민이고 싶었고 교양 없는 속물의 반대편에 서고 싶었다. 나에게 이 문제, 이 수수께끼란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모순적인 기준 앞에서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해결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다각도로 생각해 보면 반드시 답은 나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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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스키의 범죄를 자세히 알게 된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가 180도 바뀔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지식은 그냥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17-18p)
그의 범죄를 용서했기에 그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용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조건과 개인사를 이해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
폴란스키의 인생에 드리운 비극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비극이 그에게, 한 개인에게 일어났다. 그래도 이런 맥락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용서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앞뒤로 꼼꼼히 따져 보니 참작이 되어 그의 범죄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고 결정 내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영화가 그저 훌륭해기 때문에 더 보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폴란스키는 천재이고 그것이 문제 해결의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찌릿한 통증에 가까운 불쾌한 느낌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찌릿한 통증 이상이었다. 내 양심이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폴란스키의 죄라는 망령이 이 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생각만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폴란스키의 영화가 형편없었다면 그는 관객에게 아무 고민거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블랙홀이 되어 버린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안다.
현대 인물들 중에서 명징한 괴물성과 명징한 천재성이라는 두 가지 힘을 평등하게 만들어 조화를 이룬 인물은 한 명도 없다.
폴란스키는 세기의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폴란스키는 열세 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했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사실이 존재한다.
이 모순 사이에서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20-21p)
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저울, 보편적인 답변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저울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집단 성폭행을 당한 친구는 여성을 유린하고 학대한 창작자의 모든 작품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기에 예술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게이 친구는 작품과 창작자는 완전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사람 말이 모두 맞을 수도 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24p)
남자들은 우디 앨런이 왜 그렇게까지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든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맨해튼>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났다고 하면 남자들은 말한다. "그 감정 말고요. 그건 틀린 감정이에요." 그는 권위를 갖고 이야기한다. <맨해튼>은 천재적인 걸작이 맞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물의 이력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역사의 승리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 승자는 남성이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관객이다. 이 상황과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순이 사건은 <맨해튼>의 감상을 분명히 방해한다. 또한 영화자체로도 근시안적이고 한계가 있다. 물론 영화에는 추앙받을 요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앨런의 개인사가 상관없어야 한다는 말로 상관없게 만들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58-59p)
내가 우디와 순이를 험담할 때 느끼는 정당한 분노 속에서 나 또한 어떤 수준에서는 내가 완전히 올곧은 시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일상적인 행동과 생각 안에서 나는 충분히 상식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무엇이기도, 어딘가 불쾌한 사람이기도 하다.
(...)
나는 인간의 조건이 자신 안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은밀하게 의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매혹되곤 할까? 우리 안에,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끔찍함에 공명하면서 내 안에 그 끔찍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문제의 괴물을 요란하게 비난하는 드라마에 짜릿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은 사실 정치적 충동이다. 앞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확성기가 될 수도 있다.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대 그들. 도덕적인 사람들 대 비도덕적인 사람들. 어떤 사람을 더 잘못되고 그릇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쩌면 우리를 더 옳은 사람, 괜찮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60p)
문제는 우리가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 수 있는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냥 우리에게 일어난다. <사인펠드>를 켜면 원하건 원치 않건 마이클 리처즈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앎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문화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어 지난 세기에 급성장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번성하고 있다. 이제 스타의 개인사를 피할 방법은 없다. 내 생애 동안에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개인의 이력은 누군가 찾아내고 원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얻을 수 있는 정보였다. 이제 그것은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기처럼 떨어진다.(69p)
우리는 개인사가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고,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하나의 얼룩은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온 이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취소(캔슬) 당했거나 취소당할 예정이다.(73p)
동료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정작 내 인생은 지나가버려." 진짜 인생이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어둠 속에서 앉아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성싶었다.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서 인생을 '살아야'하는 것 아닐까. 중재인으로 사는 건 그만하자. 나의 낮이 캄캄한 밤으로 채워지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던 중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영화는 내게 정확히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선물하지는 않았지만 환한 전구가 하나 더 달린 것 같은 삶을 선사했다.(90p)
하나의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전기가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전기가 예술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고, 수용자의 전기가 예술 감상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모든 경우마다 일어난다.(109p)
예술가는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관습뿐만 아니라 정신적 혹은 정서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할까?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는 예술가라는 개념은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 즉 바이런식의 영웅 이미지 안에서 마취되거나 매끄러워지거나 예쁘게 다듬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미지는 특정 사람에게만 열려 있고 그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다들 남자다.(138p)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주제가 시험대에 올라온 적은 많았다. 필립 로스는 (다른 많은 작품을 썼지만) 성차별적인 남자에 대해 썼다는 이유로 성차별주의자로 불렸다. 제임스 설터는 마지막 소설에서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녀의 성관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남성 욕망의 가장 시커먼 강물에서 나온 기록들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범죄는 아니다.(190p)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과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효율적인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있거나 자녀가 없거나, 남자다.(206p)
소설가 존 밴빌은 「아이리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약간 거칠게 말하자면 자기는 형편없는 아빠고 그에 더해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럴 거라고 말했다. "(글쓰기는) 너무나 고달픈 일이고·····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아이들고 고달프게 한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작가 중에 좋은 아빠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란 너무 많은 것을 취하고 너무 많은 산소를 빨아들인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고달프게 한다." 타협에 대한 중언부언은 없다. 그는 더 일반적인 작가론을 펼친다. "우리는 무자비하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일 수 있고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와 사는 것은) 고역이다."(210p)
두 가지 방식의 읽기ㅡ"삶에서부터 읽기"와 "시를 위한 읽기"ㅡ가 분리될 수 있다는 개념은 터무니없다. 파델이 말했듯이 두 가지 형태의 작품 감상은 결투를 벌이는 권투선수인 걸까? 지각 있는 사람은 이 두 방식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분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 현실 속 플라스의 신화가 그녀의 작품을 읽는 데 방해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작품 자체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렇다. 가끔은 그녀의 신화가 진지하고 면밀한 독서를 힘들거나 복잡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를 읽는 더 정확한 방법이 있다는 논리는 어리석다.(270p)
"모든 사람이 재활용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누구도 이 명령에는 저항할 수 없다. (···) 재활용을 '모든 사람'의 책임으로 만들면서 구조는 그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난다. (···) 모든 사람ㅡ개인 한 명 한 명ㅡ에게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고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도 책임이 없고 그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늦추기 위해 해야 할 일의 규모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관이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재활용하고 물병을 재사용하고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등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집단적 힘이 없는 우리 원자화된 개인은 매우 용맹스러워 보이는 우리 소비, 우리 행동, 우리 결정이 실은 궁극적으로 의미 없다는 감각만을 갖게 된다.
피셔는 책에서 고립된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 소비의 비도덕성을 받아들이라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예술은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경험은 이를테면 드라이버 하나를 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우리는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 때도 소비자의 역할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소비자란 근본적으로 타락한 역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괴물성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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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터지면 비평가들은 곧바로 "그래서 그 X의 작품은 다 버릴 겁니까?"라고 물으면서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 문제의 초점을 가해자와 가해자를 지지하는 시스템에서 개인 소비자로 옮긴다.
개인의 해결은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의 이상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났기에 더 좋은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시스템에서 시선을 돌려 개인 선택의 중요성에 더 집중하기를 원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개인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비자의 선택과 연동된다. 당신의 소비가 당신이다. 당신은 결국 당신의 팬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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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건을 살 때 판단력을 발휘하여 도덕성을 구현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통제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광경에 더 갇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광경의 허구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어떨까?
유명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는 일은 결국 얼룩이 없는 긍정적인 유명인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한다. 나쁜 유명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좋은 유명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주입한다. 유명인이란 도덕성의 주체가 아니고 재현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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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정답은 없다. 당신이 그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다. 책임감이란 케케묵은 생각이며 비극적으로 제한된 소비자의 역할을 강화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없고 권위자가 있어서도 안 된다. 이제 당신은 곤경에서 벗어났다. 당신은 일관적이지 않다. 당신은 마이클 잭슨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에 대해 거창하고 통일된 이론 같은 걸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은 계속해서 위선자로 살 것이다. 당신은 <애니 홀>을 사랑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한 점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없다. 사실 소비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 뿐이다.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당신을 나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294-297p)
"당신이 1990년에 마일스와 여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다룬 책 「마일스에게 화나다: 진실을 향한 흑인 여성의 가이드」를 읽고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이전처럼 듣지 못했다는 재즈 팬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클리지는 대답했다. "아니다. 전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마일스는 오래전에 죽지 않았나. 그리고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의 <카인드 오브 블루> 음반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인터뷰를 사랑한다. 우리와 작품과의 관계에서 열린 결말을 말하고 있어서다. 우리는 변하고 작품과 우리의 관계도 변한다. 권위에 또다시 대항할 수 있다. 클리지는 마일스를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알면서도 사랑한다. 우리의 관계 또한 성장하면서 변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티븐 프라이는 바그너를 사랑하고, 나에게 데이비드 보위를 들어도 되냐고 묻는 대학생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사랑하고, 나는 폴란스키를 사랑한다.
이 사실들이 이상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실임에는 틀림없다.(310p)
ㅡ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中,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