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4

 

 

영감은 있다. 그렇지만 글을 쓸 때 그걸 찾아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이냐고요? 글을 '쓸 때'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글을 '쓰기 이전에' 영감을 찾아놓아야 합니다. 책상에 앉기 전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어디에?

바로 우리 내면의 냉장고에요.(33p)

 

 

글쓰기에 있어 장애물과 방해 세력은 기본값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고상하게 글을 쓰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며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글 쓰기 좋은 날은 없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날이 좋은 날입니다.(66-67p)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옮길 때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원작보다 못하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 창작자의 실수나 부족함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소설에서 다룬 '언어화된 내면'이 결코 화면으로 옮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상 언어는 원칙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으로만 인물을 보여줄 수 있고, 거기에 내면은 포함되지 않으니까요.(130p)

 

 

그렇다면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방식은 주인공의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를 엇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의 주인공은 100억 원을 모으고 싶습니다. 이것을 스토리텔링에서는 외면적 목표라고 부릅니다. 물질적이고, 구체적이고, 숫자나 물건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목표.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은 대단히 많겠지요. 이것만 있다면 우리의 주인공은 세상의 다른 많은 사람과 변별되지 못할 겁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내면적 목표가 등장합니다. 내면적 목표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신 주인공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목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과거, 상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다시 말해 내면적 목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영수증이자 카드 명세서, 자기소개서나 이력서 같은 것입니다. 주로 주인공의 욕망과 두려움이 어떤 커다란 사건을 만날 때 만들어지곤 하죠.

(...)

따라서 주인공의 목표는 늘 이중적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깊이를 만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에요. 이제 남은 일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겹'과 '층'으로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죠. 이런 결말을 생각해 봅시다. '주인공은 옛사랑을 되찾기 위해 100억 원을 모았고, 결국 옛사랑을 되찾았다!' 어떤가요? 이런 이야기는 매우 표면적입니다.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가 모두 이뤄졌기 때문이죠. 겉과 속이 너무 쉽게 일치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깊이가 생기지 않거든요.

핵심은 엇갈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엇갈리게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희극을 만들고 싶다면, 외면적 목표를 좌절시키고 내면적 목표를 성취시키세요. 비극을 만들고 싶다면 반대로 하면 됩니다. 외면적 목표를 성취시키고 내면적 목표를 좌절시키는 것이죠.(171-172p)

 

 

서사를 기술하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에 시간을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을 뒤로 밀어내어 인물이 움직이게 하고 사건을 앞으로 진행시키는 거죠. 그렇다면 시간의 측면에서 묘사는 서술과 무엇이 다를까요?

묘사는 시간을 멈추는 일입니다. 서술과는 반대되는 개념이죠. 되도록 시간이 흐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자, 어떤 인물이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들어갔다'는 것은 서술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인물의 위치가 바뀌었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간 인물은 그곳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천장에는 18세기 스타일의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벽에는 누렇게 변색된 인물화가 여러 점 걸려 있습니다.

(...)

이것이 묘사입니다.(178p)

 

 

작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감각 가능하게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작가가 해야 할 일이고, 임무이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감각을 잘 쓰고 있는지, 혹은 못 쓰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추천하는 연습이 있는데요, 여러분도 시도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일단 다섯 가지 색깔의 펜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내가 쓴 소설을 출력해서 앞에 두고, 읽어 내려 가면서 다섯 가지 감각적 디테일(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등장할 때마다 표시해 두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가장 적게 사용한, 혹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색깔의 펜이 나올 겁니다. 그게 바로 내가 잘 사용하지 못하는 감각입니다.(188-189p)

 

 

'하지 못해서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르지요. 그렇다면 프로페셔널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사람'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프로입니다. 프로페셔널은 '무엇을 더해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빼야 할지'아는 사람이니까요. 이건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예술에 적용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201p)

 

 

한 줄의 대사가 많은 의미를 품은 채 농축된 형태로 표현된다면, 긴 대화는 의미를 희석시켜 흩어버립니다. 역시 뭐가 좋고 뭐가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이 둘의 차이를 잘 알고, 필요할 때 적절한 방식을 골라 쓰는 것이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218p)

 

 

많은 사람이 자기가 그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합평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

작가는 의도에 관해 말하지요. 하지만 독자에게 도달하는 것은 언제나 효과입니다. 의도와 효과 사이에는 대체로 아주 길고 복잡한 터널이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중간에 막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도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242p)

 

 

"내 생각에는 두드릴 고가 더 좋겠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뜻밖에도 퇴고의 핵심이 바로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밀 퇴와 두드릴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251p)

 

 

저는 왜 버틸 수 있었을까요?

나는 왜 견딜 수 있었을까?

이제 와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긴 실패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말하자면 데뷔하고도 다시 14년이 흘러 2024년이 되어서야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재능이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이뤄 내기 전까지 이룬 척해라(Fake it till you make it.)". 이건 사기꾼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작가처럼 읽어야 합니다. 작가처럼 써야 합니다. 작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265p)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습작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써야 합니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계속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수업에서 단편 한 편을 쓰고 그걸 몇 년째 계속해서 고치고 있는 분들을 봅니다. 그 소설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실에서 제가 자주 하는 충고는 일단 단편이 열 편이 될 때까지는 퇴고도 하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다음 소설을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어떤 장점이, 어떤 가능성이, 어떤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는지는 나 자신도 모릅니다. 질은 양에서 나오고, 여러 편을 써봐야만 그중에 더 나은 것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302-303p)

 

 

 

 

ㅡ 문지혁, <소설 쓰고 앉아 있네> 中,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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