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9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의 근원은, 샴페인 거품 같은 환희가 순식간에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 저 걸인이 엄마에게 감사하는 것도 덤벼드는 것도 어디까지나 초라한 충동에 달린 일이라는 사실,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마님 소리에 한껏 의기양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사탕을 핥는 것 외에 없다는 사실.(75p)
세계의 치명적인 진실은, 모두의 망상이 서로 단절되어 있으며 정신병자조차 다른 정신병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랄까, 물과 물 아닌 것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청산가리와 메탄올은 둘 다 인간을 죽이지만,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근거 삼아 두 물질이 중화되어 물로 바뀌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을 믿는 정치꾼 노인은 자신이 나폴레옹의 환생이라 믿는 여자를 비웃고, 나폴레옹의 환생은 유대교 카발라와 베다 점성술에 심취한 학생을 조롱한다. 나폴레옹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점성술은 미신이니까. 심지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싸우는 경우도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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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상징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영토를 밟고 있음을 보게 되면, 뒤엉킨 대화를 풀어내기가 훨씬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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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가 아닌 부분은 호흡이나 살덩어리나 경험 따위고, 중추는 그들 각각의 믿음이다. 영혼은 몸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아퀴나스가 말했듯, 그들의 육신과 기억은 현실에 비스듬하게 걸친 믿음의 퇴적물이다.(111-112p)
어떤 사람의 믿음은 그가 태어난 곳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상징계의 주소는 그 믿음의 내력이다. 회복주의 기독교 교파의 조기교육 과정을 통해 종말론을 배웠는지, 통제광 할머니와 게으른 아버지 사이에서 이중구속을 겪으며 칼 세이건의 책을 피난처 삼았는지, 금융위원회 위원장인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서 자랐는지 같은 것들이 한 사람의 좌표를 결정한다. 이는 인간이 다음 세대를 낳는 과정이자 개인이 자기 자신을 퇴적시키는 방식이다. 가령 내가 방구석에 틀어박힌 상태로 컬트적인 정치-신학-금융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과 별개로.(131-132p)
아무튼 나는 인간이 좋고, 윤리와 정치와 기술과 경제(그중에서는 계급보다는 화폐와 금융과 시장)가 좋고, 사람들이 마주치며 발생하는 관계들이 좋고, 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좋다.(176-177p)
ㅡ 단요,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中, 트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