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

 

제목 그대로 일급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다섯 번 만나 나눈 대담을 묶은 책.

이 책이 부르디외의 생각을 느껴보기 가장 좋은 입문서(?)라니... 말랑말랑한 책들만 읽다가 이런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 어려웠다.

5번의 대담을 묶은 책이라 분량이 많진 않으나 밀도가 상당했다. 하비투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몇몇 개념은 평소에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장(field)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라 신선했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매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르디외의 말에서, [사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인식의 대상 속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이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위치를 알게 되며, 바로 그런 위치에서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하듯 고통스런 '정신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8-19p)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작업 속에는 푸코식으로 말해서 확실성의 껍질을 벗겨 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그런 주장과 거의 비슷한 문장이 발견됩니다.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자동성을 파괴하기." 사회세계에서 외견상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을 문제화한다는 것이죠. 이는 이를테면 "이것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할 수 없어. 이것은 언제나 그래 왔어·····" 같은 식으로 자명성을 전제하는 모든 주장과 단절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증명하듯이 자명성은 언제나 특수한 내기물 및 세력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구성됩니다.

(...)

아무튼 확실성의 껍질을 최대한 벗기는 작업에서 선생님이 취한 방식 중 가운데 하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 경계, 분할, 구획들이 사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말이죠.(35p)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사회학자의 모든 작업은 행동의 관찰, 담론, 문서 자료 등에 기초해서 진실의 도출에 필요한 조건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들은 민중이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훨씬 더 참된 말을 한다고 믿지요. 사실 민중은 각별한 피지배 상황에 처해 있는데, 특히 상징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광부들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그들이 진실을 수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발상이 좌파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 한창 유행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수집한 것은 앞선 30년 동안 노동조합이 유포한 담론들에 불과합니다. 한편 농부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약간의 변형이 있긴 해도 초등학교 교사들의 담론을 수집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57-58p)

 

 

엘리아스는 저에 비해서 훨씬 더 연속성에 민감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스포츠 사례를 들자면, 고대의 올림픽에서 현재의 올림픽까지 연속적 계보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스포츠사가가 그렇게 하는데요, 저는 이런 작업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외양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이는 19세기에 일어난 거대한 단절을 은폐합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엘리트 기숙하교가 유행했고, 교육체계가 변화했으며, 스포츠 공간이 출현했습니다···· 달리 말해, 술과 같은 전통 게임과 근대 축구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이는 완전한 단절입니다. 예술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사이의 관계가 피사로와 강베타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불연속이 존재하며, 불연속성의 기원 또한 존재합니다.(106-107p)

 

 

문학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플로베르 이전에는 예술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여기서 저는 의도적으로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충격을 받도록 말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가라는 식의 주장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겠죠.

(...)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장인은 언제부터 예술가로 변모했는가?" 그런데 예술가는 사실 장인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다른 소우주로의 이행이 일어난 것이죠. 이행 이전의 소우주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규범에 따라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거기에서는 일반적인 [상품] 생산의 규범을 따릅니다. 반면에 이행 이후의 소우주는 경제세계 내부에서 하나의 고립된 독자적 소우주, 일종의 전도된 경제세계입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시장 없이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즉 그들은 어떤 경우엔 평생동안 한 작품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산합니다. 또 그들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본[특히 문화자본]을 충분히 갖춰야 합니다. 말라르메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의 경우가 그랬죠.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1880년대 이전의 시기에 예술가나 작가라는 개념을 투사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부정확한 용어를 쓰는 야만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ㅡ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中, 킹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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