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

 

 

댈러웨이 부인(시공사 판본 기준으로 열린책들 참고), 안나 카레리나(문학동네), 사랑에 관하여(펭귄), 철도 여행의 역사(볼프강 쉬벨부쉬)는 챙겨봐야지.

 

 

 

이런 안나의 태도를 보며 골리니쉬체프는 생각한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이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미할수록 흥미로운 대목이다. 독자 또한 골리니쉬체프의 시선을 따라 안나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매력이나 본질은 자기 자신은 오히려 모르고 낯선 타인이 먼저 알아봐 주는 것이란 생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43-44p)

 

 

예의범절의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여봐요. 그들에게 당신의 고통, 즐거움,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들려줘 봐요. 처음에는 관심 있는 척하겠지만 곧 냉담해질 거예요.(74p)

 

 

포의 작품은 논리에서 출발하며, 그의 인물들은 줄곧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 및 현상이 있음이 강조된다. 인간의 지각이란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이어서 어떤 현상의 원인 결과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재하는 어떤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신문 헤드라인으로 뽑으면 이런 식이 되겠다. "포, 이번에도 열심히 관찰했지만 이해는 실패···."(101p)

 

 

에밀 졸라는 기본적으로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작가여서 그냥 묘사를 읽어나가는 재미만 해도 상당하다. 대사 역시 노동자들의 말투가 그대로 드러나 생생함을 전달한다. 여기에 얹어지는 중요한 작가적 시각이 있는데, 바로 졸라가 취한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다. 그는 냉정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살이를 바라봤다. 요컨대 인간의 운명에는 개인의 의지나 열정, 선한 마음 같은 것보다 유전과 환경 같은 자연법칙이 훨씬 중요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 세계관이 반영된 문학 또는 예술을 '자연주의'라 부른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자연주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관찰, 분석, 검토, 보고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실주의와 더불어 19세기를 특징짓는 문예사조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는 이후 20세기 초중반(그리고 후반)까지 서구는 물론 비서구권 여러 지역에서 문학과 예술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되었다.

에밀 졸라는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았는데, 그의 관점은 어떤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 전체라는 관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 아래 졸라는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사회의 풍속, 가치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곧 시대상 전체를 상세히 묘사한다. 이런 면에서 졸라의 소설들은 '예술'보다는 '사회과학'에 더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279-280p)

 

 

처음 얼마 동안은 읽을 수가 없었다. 주위의 혼잡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방해를 했으며,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왼쪽 창문을 두드리며 창틀에 쌓이는 눈송이, 방한구를 뒤집어쓴 채 몸 한쪽 면이 온통 눈에 덮인 채 지나가는 차장의 모습, 밖에 눈보라가 참 무섭게 몰아친다는 사람들의 얘기 소리,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똑같은 것의 연속이었다. 뭔가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기차의 진동, 창문을 두드리는 눈, 뜨겁다가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하는 증기열의 변화, 어둑함 속에서 아른거리는 똑같은 얼굴들과 똑같은 목소리들. 그래서 안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은 것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내용도 이해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삶의 반영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자기도 조용한 발걸음으로 병실 안을 걷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고, 의회 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을 읽을 때면 자기도 연설을 하고 싶어졌다. 또 레이디 메리가 말에 올라타 사냥을 하며 시누이를 약 올리고 그 대담함으로 좌중을 놀라게 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자기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조그만 손으로 매끈한 페이퍼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334-336p)

 

 

하지만 시라는 것은 너무 어린 나이에 쓰면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두고, 가능한 한 오래 살면서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 아마 오랜 삶의 맨 마지막에 열 줄 정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경험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온갖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만 한다. 새들이 어떤 식으로 나는지 알아야 하며, 아침에 꽃이 필 때 꽃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기억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아진다면 그것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기억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 그 자체로는 아직 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태도가 되고, 이름 없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너무나 드문 한순간에 그 기억의 한가운데에서 시구의 첫 단어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353-355p)

 

 

서가 오른편의 창문이 열려 있지 않나요? 책 읽기를 멈추고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요!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 (...) 독서와는 전쳐 무관한 그 무의식적이고 끝없는 움직임이 얼마나 상상을 자극하나요?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떻게 된 일인지 창문이 열려 있었고, 책은 에스칼로니아 울타리와 멀리 펼쳐진 하늘을 배경으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책이 아니라 풍경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인쇄되어 엮이고 제본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와 들판과 더운 여름 하늘이 만들어낸 작품 같았고, 맑은 아침에 사물들의 윤곽을 따라 헤엄치는 공기 같았다.

- 버지니아 울프,「독서」

 

바로 이것, 창문 밖 주변 풍경을 내다보게 만드는 것이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주변 세상을 살피게 한다. 창밖 풍경(자연)은 물론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의 풍속과 감정과 사람들 등 '다른 세계'를 살피게 한다.

책은 그 속으로 파고들면 나에게 유용한 정보와 통찰을 캐낼 수 있는 지식의 보고 같은 것이 아니다. 내 정신을 살찌우는 양식 같은 것도 아니다. 책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평소엔 하지 않았던 딴생각을 하게 만드는 촉매다.

우리의 독서 경험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책 속으로 파고드는 것 자체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책 읽기는 자꾸만 중단된다. 우리는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에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곤 한다. 카페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펴놓고는 있지만(마치 사진의 울프처럼) 창밖 풍경을, 인테리어 소품을 멍하니 바라볼 때도 많고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많다.(374-376p)

 

 

한편, 위에 언급된 산시로의 독서 경험 중 세 번째 장면을 보면 산시로가 「하이드리오타피아」의 마지막 구절을 두고 "이 한 구절이 주는 의미보다는 그 의미 위에 드리워진 정서의 그림자가 더 반가웠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사실 17세기 영국 작가(토머스 브라운)와 20세기 일본 독자(산시로)의 거리는 '명문 감상'을 불가능하게 하기에 충분한 거리다. 오랜 옛날 영국 의사의 책, 그것도 고대 로마의 장례 절차를 서술한 책이 20세기 초 일본의 새내기 대학생에게 무슨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설령 열심히 읽고 이해한다 한들 무슨 유용한 게 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서(의 그림자)'는 느낄 수 있다. 번역된 세계문학 작품들을 읽을 때 우리 역시 이 '정서의 그림자'를 느낀다.

고작 정서의 그림자를 느끼는 것 정도로 뭘 할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세계문학은 19세기 이후의 작품들인 데다 번역자들의 노력과 축적된 독서 경험 덕에, 토머스 브라운에게 산시로가 느끼는 거리감보다는 훨씬 가깝고 친숙하기 때문이다.(380p)

 

 

 

 

ㅡ 시로군, <막막한 독서> 中, 북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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