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
이 책을 읽으며 작년부터 올해까지 출간된 단요의 책을 모두 읽었다. 아마 한국 작가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 중 한 명일 텐데 자기만의 확고한 주제 의식과 넘치는 창작력이 마음에 든다. 앞으로 출간될 어떤 형태의 글이든 읽을 생각.
중독자라면 누구나 실패를 좇았다. 지금껏 잃은 돈을 복구하겠다는 포부를 호기롭게 읊는 사람이라도 실은 파탄을 원했다. 고깃국물로 사골국물을 대신할 수 없듯 승리에만 만족하기란 불가능했다. 생명줄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까지 돈을 긁어낸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희열이 있었으므로. 우혁은 그 감각에 유별나게 예민한 타입이었고, 죽었다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릴 때면 어김없이 발기했다. 그런 예민성은 중학생 시절, 물이 불어난 계곡에 발을 담갔다가 급류에 휘말린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팔다리의 움직임과 물살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인데도 미끈거리는 피가 땀처럼 살갗을 뒤덮은 것만큼은 뚜렷이 느껴졌다. 그 외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이 공기 같았다. 수면 위아래로 넘실대는 하얀 게 돌인지 팔꿈치 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갈비뼈 밑을 훑는 게 심장의 박동인가 죽음의 기운인가도 궁금했다. 통증과 쾌감이 뒤섞였다. 아득했다.(31-32p)
"우혁아, 네 문제는 그거야. 죄송하다고 한 다음 또 하는 거. 정상적인 상황이면 죄송하다는 말을 할 일이 안 생겨. 정상적인 사람은 너처럼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멀쩡하게 살면 그게 바로 대답이야. 그런데 너는 입으로만 죄송하다고 한 다음 행동은 똑같이 해. 심지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도 남달라서 막을 수가 없어. 그냥 하는 거야. 정신 나간 건 넌데 왜 내가 미치는 기분이 들까? 이유가 도대체 뭘까?“
"죄송합니다.“
(...)
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김 형의 말대로 미친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던데 자신이 딱 그 꼴이라고, 우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노예의 본분을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70-71p)
가령 나는 네가 정말로 부활을 경험했다는 걸 믿고, 그게 엄청난 은총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그 정도의 은총을 받는 건, 처음 들른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잭팟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한 불행이야. 저주나 마찬가지야. 어쨌든 사람은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부모님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데, 예수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것만 쫓아다니면 그럴 수가 없거든. 이쪽과 저쪽이 있는 거지. 이쪽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고, 저쪽은 그냥 저승이야. 그게 도박판이든 종교적 열반의 경지든 간에. 나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저승에서 방황한 축이야.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넘어오면 당장 가족의 태도부터가 변해. 내가 유령 꼴을 벗어나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 된 걸 느껴. 나는 바로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이게 맞는 길이구나, 하는 확신을 얻는단 말이야.(83-84p)
우혁은 소년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고, 절망과 희망이 한 쌍임을 절감했다. 좌절은 생생한 미래와 가망 없는 현재 사이에서 움트기 마련이다. 소년의 신통력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는 주식 계좌에 넣을 돈이 부족했다. 부모님이 못난 아들놈을 믿고 투자할 리도 없었다. 가능성의 금고에 막대한 유산을 남기더라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별무소용인 것이다.(105-106p)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종종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척했지만 결정권을 쥔 것은 기분이었다. 충동이었다. 바타유나 베르그송 같은 사상가들의 논지를 빌리더라도, 그런 고찰은 현학적인 정당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심장이 시켜서 한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에 어려운 말을 덧씌워봤자·····.(191p)
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 만합니다. 하나는 가진 사람이 더 많이 얻어내려 할 때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가지지 못한 사람이 삶을 동아줄처럼 붙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거니와 후자를 전자보다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둘은 종종 뒤섞입니다. 가진 사람의 위에는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으며, 없는 자의 아래에는 더욱 없는 자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용서와 이해는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됩니다.
보육원은 이 사실을 배우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며, 1980년대에는 특히 그랬습니다.
(...)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간은 좋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수많은 악이 기인한다고 봅니다. 악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다시 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호오를 분별하며 자신에게 족한 것을 사랑하는 습성은 인간 행위의 원천이자 선행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정체입니다·····.(198-199p)
말인즉슨 기존 종파와의 차이점을 내세우는 것은 모범적인 시장 개척법이었다. 서혜라의 새천년파는 꽤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현대사회의 세속화 경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며(그러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피하는 세태에 발맞추어), 신학과 철학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없이 살아오던 지식인들이 중년에 접어들 무렵 태도를 바꾸어, "나는 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삶의 지침을 위해 종교를 가졌다"라며 외치기 시작하는 현상을 상품화한 셈이었다. 그 나이쯤 먹으면 뭐라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매 순간 영점을 새로이 조준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롭기까지 하다. 반면 초월적인 관념 하나를 가정함으로써 세상 사람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할 이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271-272p)
삼촌과 이모들 앞에서는 일부러 아빠에게 꼭 붙어 다녔다. 학교에서는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서 맛있는 요리를 원 없이 먹는 일, 사촌동생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가 화해한 일 따위를 읊어댔다. 관광지에서 웃고 떠드는 다른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내가 그들과 결코 구분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세상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 애들도 나만큼이나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고무 튜브라든지 사랑 같은 말들을 언제 어떤 자리에 넣어야 알맞은지 항상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케이크가 파운드케이크인 이유는 밀가루와 설탕과 버터와 계란을 1파운드씩 섞어 굽기 때문이며, 세상은 몇 종류의 흉내와 그 흉내의 배합 비율로만 이루어져 있다. 비율이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재료가 들어가면 못 먹을 물건이 나오고 만다. 친구들이 나를 허언증이라 놀린 건 내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기 때문이겠지.(318p)
씨발 정말이지 단체로 세뇌당한 게 아니라면 핼러윈이랍시고 호박 모양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그렇게나 많이 사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간을 인쇄한 폴리염화비닐 카드나 귀여운 캐릭터 모양을 한 아크릴 판때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아니, 이런 것들은 단편적인 예시일 뿐이다. 뭐든 간에 웃으면서 돈 쓸 구석이 질식할 정도로 많다. 영화, 게임, 드라마, 스포츠 중계, 포르노, 책, 음악, 옷, 각종 취미 용품·····. 이런 와중 대형 마트의 매대는 여전히 각종 파스타 소스로 뒤덮여 있다(심지어 지난달에 신제품이 추가됐다). 나는 조강현의 견지에 좀 더 분명히 동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사랑하고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410p)
ㅡ 단요, <피와 기름> 中, 래빗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