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

 

 

노련한 조련사처럼 이모는 끊임없이 울고, 손을 쓸어주며 마치 노래를 부르듯 길고 긴 얘기를 늘어놓았다. 립 서비스처럼 느껴지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그러나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53p)

 

죽은 황후가 살았던, 이제는 죽은 잔디와... 죽은 나뭇잎들이 뒹구는 그 뜰은, 그래서 내가 접한 새로운 세계의 첫 페이지였다. 이뻐와 착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 페이지를, 그러나 실은 누구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인간도 돈 있어, 만으로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여자도 오빠, 나 오늘 이뻐? 로 평생을 버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내가 아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고... 나는 그런, 그녀를 만난 지극히 평범한 또래의 남자일 뿐이었다. 믿음에 관해서라면(172p)

 

놀이기구 앞엔 언제나 길고 긴 줄이 이어져 있었고, 둘 다 그런 줄 앞에서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리는 성격임을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5분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마도, 하고 나는 얘기했었다. 그런 걸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꼭 타고 가야지, 그런 심리가 되는 거지. 두 시간 줄서서 5분 열차, 두 시간 줄서서 5분 회전바퀴, 두 시간 줄서서 5분 바이킹... 우와, 거의 하루인 걸. 한적한 느낌의 참으로 시시한 회전 커피 잔에 앉아 나는 생각했었다.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 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200p)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 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225p)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 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정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현실>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늘 그랬듯(226~227p)

 

그리고 다시는 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난 후의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의 경제활동으로 변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임을, 그것이 보편적인 인생의 길임을 그 순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신의 힌트는, 늘 숲 속에 떨구어진 작은 빵부스러기와 같은 것이었다.(231p)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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