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9

 

 

동유럽의 프루스트라 불린다는데 내가 프루스트는 안 읽어봐서 그건 잘 모르겠고, 좀 덜 난해한 제발트나 올가 토카르추크 느낌.

 

 

 

빛이라면, 그것을 사진으로 포착해 보존하려는 안쓰러운 시도나마 해볼 수 있다. 혹은 모네처럼 같은 성당을 하루의 여러 시간대에 그려볼 수도 있다. 모네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ㅡ성당은 전략일 뿐, 빛을 포착하기 위한 덫일 뿐이었다. 하지만 냄새라면, 그런 비결이 우리에겐 없다. 필름도 기록 장비도 없으며, 수천 년 동안 그런 도구는 발명된 적이 없다. 인류는 이것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을까?

향을 기록하는 장비가 없다는 사실이 진정 놀랍지 않은가? 실은 하나가 있긴 하다. 기술보다 앞서 존재한 단 하나의 도구,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도구. 그것은 물론 언어다. 당분간은 언어 말고 다른 도구가 없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향기를 말로 포착해 또다른 노트에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묘사해봤거나 비교해본 향기만을 기억한다. 놀라운 점은 이런저런 냄새에 대한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혹은 아담은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빨강, 파랑, 노랑, 보라 등등의 이름이 있는 색깔과는 다르다. 향기는 우리가 직접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향기는 언제나 비교를 통해, 묘사를 통해 인식된다. 제비꽃 냄새가 난다. 토스트 냄새가, 해초 냄새가, 비 냄새가, 죽은 고양이 냄새가····· 하지만 제비꽃, 토스트, 해초, 비, 그리고 죽은 고양이는 향기의 이름이 아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가. 아니 어쩌면 이 불가능성 아래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징조가 숨어 있는지도·····(73-74p)

 

 

치아의 고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치아의 필링과 사용된 재료의 종류에 따라 시대를 십 년씩 명확히 구분하는 일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오호, 나의 치과의사는 항상 말한다. 환자분 치아는 90년대의 간략한 역사로군요. 당시의 혼란, 위기, 메탈세라믹에 대한 의기양양한 첫 실험, 신경치료의 대중화, 비뚤어지게 박은 치아 기둥, 완전한 악몽이에요. 치과의사가 고고학자라면·····(105p)

 

 

나는 기억의 텅 빈 굴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은 향기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후각이 일찍 형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일 테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맨 마지막에, 머리를 땅에 처박고 냄새를 킁킁거리는 작은 동물처럼 떠나간다.(121p)

 

 

나는 도망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른'세상에서 돌아왔고, 시간을 뒤섞어버렸다. 그런 경우에는 치료를 중단하고 퇴원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사람이 직접 퇴원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깥에서는 실제 시간이 흐르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중고 제품 같은 과거를 그들에게 속여 팔고 있다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공동체에 입소하면 환자들(적어도 병의 단계가 초기인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은 이것이 실은 치료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실험의 순도를 위해서는 다른 현실의 입자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편이 더 나았다. 환경이 다른 시대에 오염되지 않도록 멸균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도망자가 공동체로 돌아온 뒤 한 행동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저녁식사 후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깥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어떤 실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이 미래에 사는 척 연기하고 있더라고, 자네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귀에 전선을 연결하고 손에는 작은 텔레비전을 든 채 걸어다니면서 화면에 눈을 박고 고개를 들지도 않아. 돈을 엄청 쏟아부어 SF 영화를 찍고 있거나, 아니면 앞으로 오십 년 뒤에 삶이 어떻게 될지 실험을 하고 있나봐. 그것이 도망자가 공공연히 밝힌 결론이었다.(136-137p)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미래에 심각한 결손이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떻게 내일을 위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 수 있을까? 간단한 대답은 바로, 약간 뒤로 가는 것이었다. 뭐든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과거다. 오십 년 전은 지금부터 오십 년 후보다 더 확실하다. 이십, 삼십, 혹은 오십 년을 뒤로 간다면 딱 그만큼 앞서게 된다. 맞다, 그것은 이미 살아본 시간, '중고' 미래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미래는 미래다. 그래도 지금 우리 앞에 입 벌린 무보다는 낫다. 미래의 유럽은 이제 가능하지 않으므로 과거의 유럽을 택하자. 간단하다. 미래가 없을 때는 과거에 투표하는 것이다.(184-185p)

 

 

얘기가 거기서 살짝 옆길로 샜다. 용서하시길, 하지만 과거는 샛길과 일층의 작업장과 분필로 표시한 패턴과 복도로 가득하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에 대해 여백에 쓴 메모들ㅡ나중에 가서야 우리는 과거라는 거위가 바로 거기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253-254p)

 

 

나는 궐기대회의 세부 처리가 상당히 절묘했다는 점을 떠올렸고 그 정도의 말을 해주었더니 뎀비는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스피커 소리를 갈라지게 한 게 좋았어. 일부러 그런 거지?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음향 상태 확인 과정의 실수 말이야. 음향 기사가 욕하고····· 사람들은 그런 걸 기억해. 내 말 믿어도 돼, 하나같이 똑같았던 사회주의 시절의 무수한 궐기대회에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정확히 그런 거야, 그런 실수. 그리고 지금 그걸 재현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때로 곧장 돌아가는 거지.(290-291p)

 

 

어떤 나라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 불행이라면 왜 불행을 단념한단 말인가ㅡ그들에게 슬픔이라는 원유는 유일하게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깊이 팔수록 더 많이 채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국가적 불행의 무한한 매장고. 민족과 국가가 저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거대한 환상이자 자기기만이다. 행복은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견디기도 힘들다. 그런 휘발성 물질, 깃털처럼 가벼운 그런 환영, 바로 코앞에서 터저버려 눈에 매운 거품이나 튀길 비눗방울을 갖고 뭘 하겠는가?

행복이라고? 행복은 볕에 내놓은 우유처럼, 겨울날의 파리나 초봄에 핀 크로커스처럼 금방 부패한다. 행복의 등뼈는 해마의 등뼈처럼 연약하다. 훌쩍 등에 올라타 멀리 내달릴 수 있는 튼튼한 암말이 아니다. 교회나 국가의 기틀이 될 주춧돌이 아니다. 행복은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거기에는 전투, 집단 학살, 배반, 어느 대공의 유혈 낭자한 살해 따위만 들어갈 수 있다) 연대기나 실록에도 실리지 않는다. 행복이란 독해 책과 외국어 숙어집, 그중에도 초급 교본에나 나올 뿐이다. 행복은 언제나, 아마도 문법적으로 가장 쉬워서겠지만, 현재시제로 이야기된다. 오직 현재에서만 모두가 행복하고 태양은 빛나고 꽃은 향기롭다. 우리는 해변에 가는 중이에요, 여행에서 돌아오고 있어요, 실례지만 근처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을까요·····

검劍은 행복을 벼려 만들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원료는 연약하고 부스러지기 쉽다. 행복은 웅장한 소설이나 노래나 서사시에 적합하지 않다. 노예의 사슬도, 함락된 토로이도, 배반도, 날이 무뎌진 검과 부서진 뿔피리를 지닌 채 언덕에서 피 흘리는 롤랑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늙은 베어울프도 없다·····

행복의 깃발 아래로는 군단을 불러모을 수 없다·····

실로 어떤 나라도 불행을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지하 저장고에서 잘 익어가는 와인과 같은 불행을. 국가적이고 전략적인 불행의 비축. 하지만 지금(최초로) 행복을 선택할 순간이 왔다.(331-333p)

 

 

추측하자면, 1968년에는 1968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누구도, 어이, 이봐, 우리가 지금 살며 경험하는 이것 말이야, 이게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68이야,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발생한 지 오랜 뒤에야 발생한다····· 이미 생겨났다고 추정되는 어떤 일이 정말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연되어 발생한다. 사진을 인화할 때 이미지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타나듯이····· 1939년도 1939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불확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두통을 느끼며 깨어나는 아침들이 있었을 뿐.(334p)

 

 

프라하의 봄 이후 파멸의 여름이 찾아왔고, 삶이 부서질 때 늘 그렇듯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꾼다. 거리를 행진하던 이들은 그해 여름과 그뒤 모든 여름의 추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고분고분한 이들이 밖을 기웃거리다 불려 나와 비어버린 자리를 차지한다. 당신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충돌, 깨진 창문, 망명자, 수감자, 폭행과 강간 피해자, 심지어 살해된 자가 아니라, 훗날 어느 오후에 거리에서 웃고, 함께 어울리고, 당신을 오래 삶에서 내쫓을 그 똑같은 체제 안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들을 볼 때 미묘하게 찾아오는 오싹한 허무감이다. 역사에는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있으니 오륙십 년 정도는 망쳐도 별 탈이 없다. 역사에게 그 정도는 고작 일 초나 될까 말까 한 시간이다. 하지만 역사의 일 초가 일생인 인간-하루살이는 무엇을 해야 하나? 68에 뒤이은 그 오후들 때문에 프라하는 60년대를 선택하고픈 마음이 없었다.(349-350p)

 

 

 

 

 

ㅡ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타임 셸터>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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