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9

 

저자의 주관적 해석을 크게 개입시키지 않는 책. 아주 간략하게마나 버지니아의 울프의 생애와 주요 작품에 얽힌 사실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두 번씩 켄싱턴 가든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 점점 따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버지니아는 항상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왕의 문'에는 견과와 구두끈을 파는 여자가 있었고, '꽃 산책로'에는 자잘한 요철 장식물이 있었다. 대개 기삿거리가 있었고, 없는 경우에는 버지니아가 소설을 썼다. 버지니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였던 만큼, 버지니아가 쓰는 소설은 아주 긴 연재소설인 경우가 많았다.(20p)

 

 

그때 버지니아 스티븐에게 가장 괴로웠던 점은 느껴야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낮추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모든 관례화된 공개적 애도의 안쪽에 담겨 있는 것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슬픔이 아니라 슬픔보다 더 괴로울 수 있는 무감정이었다.

'나는 그때 했던 혼잣말을 지금껏 위기의 순간마다 되풀이해왔다. "아무 감정을 못 느끼겠어."'

외적 기대와 내적 경험의 불일치를 어렴풋이 감지했다고 할까. 하지만 울프가 그 불일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스케치>를 쓸 때였다.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 슬픔의 관습에 갇혔다. (중략) 원치 않는 역할을 연기해야 했고, 이해하지 못한 대사를 기억해내야 했다."

후일 울프는 소설을 통해서 그런 껍데기를 부술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그러면서 중요한 순간은 사회가 명하는 '이때'가 아니라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그때'라는 것, 우리의 감정은 시간을 지키지도 않고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무감정을 용납하기도 하고, 사건에 대한 반응이 이상하게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도하며, 경험의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세 살의 버지니아 스티븐은 갇힌 느낌, 짓눌린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29p)

 

 

울프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에 "H"모양("두 개의 직사각형이 한 개의 선으로 연결된"모양)을 그렸다. 과거, 중간 휴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세 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등대로>의 플롯이자 요점이었다.

울프 자신도 인정했듯이 <등대로>는 가족력의 유령들을 잠재우는 작업이었다.

(...)

부모에 대해서 스는 과정(울프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분석과 흡사한 과정)이 울프의 정신 속에서 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지만(울프는 소설 <세월>에서, 그리고 회고록<과거의 스케치>에서도 계속 부모에 대해서 쓰게 된다), 울프가 <등대로>를 통해 자신과 이 두 강력한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울프에게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그리는 일은 곧 자기 부모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울프는 램지 부부에 대해 씀으로써 한 아이의 시선으로 자기 부모에 대한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령이 다양한 8남매의 시선을 통해 한 아이가 한 가정에서 서서히 커가는 느낌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감정적·과장적·의존적 앎인 만큼, 울프는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아이의 시각뿐 아니라 어른의 시각으로, 곧 어른이 어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공감적 시각으로도 보기를 원했다. 마흔네 살이 된 울프가 중년이 된 부모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부모와 대면한 것이다. 바네사는 <등대로>를 읽자마자 이 초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장성해서 엄마와 동등해진 내가 엄마를 만난 것 같아."(121-122p)

 

 

<파도>에서 "등장인물은 여섯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여섯 사람이자 한 사람인 등장인물은 울프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울프 자신들이기도 하다. 울프가 일기에 썼던 말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울프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전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의 울프를 닮았다. 고전문헌학 교수 니벨은 울프가 마다한 기득권층의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니벨이 주머니 속의 '이력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의 가치를 불안한 듯 가늠하는 모습은 울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생각은 클러리사 댈러웨이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울프가 자신의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친 작업은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차원에서 "모두 하나"라면, 화자가 바뀌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말하는 내용은 달라도 말하는 리듬은 똑같다.

(...)

울프가 리듬을 타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독자로 리듬을 타면서 읽어야 한다. 속독을 불가능하다. 소설의 속도는 등장인물들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느긋한 속도에 맞추어져 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할 때 느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경이로움이다. 그들의 독백은 현재형 시제의 독백, 곧 경이로운 것들 사이에서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의 놀라움을 들려주는 듯한 어조(다 큰 어른들에게서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어조)의 독백이다. <파도>는 울프의 가장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지만, 울프의 목소리 속의 어린아이 같은 어조를 가장 분명하게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울프에게는 질릴 줄 모르는 호기심과 디테일을 향한 욕심이 있었다고 울프의 친구들은 종종 이야기했다. 어린아이들이 울프에게 끌린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비타 색빌웨스트의 아들 나이겔 니콜슨도 울프에게 끌린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울프가 그날의 사건을 들려달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했다.

"사건은 없었는데요. 그냥 학교에서 집까지 왔어요."

울프가 다시 물었다.

"저런!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아침에 무엇이 너를 깨워주었을까?“

내가 대답했다. "태양. 이튼에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

그러자 울프가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어떤 태양이었을까? 웃는 태양? 화난 태양?“

나는 이런 식으로 울프와 함께 내 하루를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154-155p)

 

 

<세월>이 울프를 자살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것, <세월>과 1930년대 중반의 정치 상황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세월>이라는 픽션은 <3기니>라는 난폭한 논픽션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는 것, <세월>의 형식 패턴은 총체성의 비전보다는 와해와 결렬에 가깝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 이 사실들 때문인지, <세월>에 대한 비평은 그리 열렬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평가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실패와 고통(<세월>의 작가가 겪었던 실패와 고통, 그리고 <세월>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고통)이고, 비평가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세월>이 <파도>와 완전히 상반된 작품이라는 점, 곧 내면 세계(서정성)를 뒤로 하고 바깥 세계(복잡한 리얼리즘)를 향한다는 점이다. <세월>은 울프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덜 읽히고 가장 덜 가르쳐지는 작품인 만큼, 지금 일반 독자 중에 <세월>을 읽는 독자는 간혹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은 울프가 생존 작가일 때 영국 국내에서 가장 빨리 팔려나간 작품이었고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유일한 작품이었다. <세월>이 일반 독자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뜻을 울프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파도>의 판매고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울프가 '일반 독자'를 중요시한 작가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182-183p)

 

 

 

ㅡ 알렉산드라 해리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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