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31
이 소설에서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내포하는 식으로 동물을 의인화 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고 결코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점을 새롭게 평가하는 듯.
그랬던 내가 어떻게 두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양심에 관한 속담을 예로 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면 삼각형은 마음속에서 회전하며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다 보면 뾰족했던 모서리가 닳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내 마음 속에는 크고 작은 삼각형들이 생겨났다. 그중 죽음에 관한 삼각형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소식이 궁금하던 중학교 동창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모서리가 닳아갔다.
한동안 나는 삼각형의 모서리가 다시 자라길 기다렸다. 첨예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다시 자라나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삼각형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삼각형은 내 삶의 모양에 맞춰 모양이 변했다.
한때 삼각형이었던 마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평생 알고 싶지 않던 어른들의 마음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굴레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척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103-104p)
세월이 지남에 따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한동안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했다. 17년간 이어지던 두희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에 의지했다. 시간이 모든 걸 말끔하게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이마에 남아 있던 수영모의 밴드 자국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사라져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내 문제를 떠안고 멀리로 흘러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일까.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어째서 두희의 방바닥에 남은 패인 자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두희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희의 흔적은 장판 위에 남은 자국뿐이었다. 비바리움을 올려놓았던 선반의 귀퉁이가 몇 년간 장판을 눌렀던 흔적이었다. 장판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눌린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141-142p)
두희와 함께했던 시간은 두희의 죽음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다양한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 상실과 위안 들이 나의 경험으로 남으면서 나에게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182-183p)
"근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거야? 우린 인간이잖아. 얘네도 타란툴라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텐데."
"사람들이 가진 힘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잖아."
비바리움들을 전부 돌아본 나는 J가 데리고 있는 타란툴라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블루프로그에 남아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흔해서, 은신처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관찰이 어려워서,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서, 발색이 애매해서, 다리 부절을 회복하지 않아서. 타란툴라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문제처럼 여겨지는 건 확실히 균형 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219p)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리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225p)
ㅡ 정덕시, <거미는 토요일 새벽> 中,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