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23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주체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상상한다. 이 연관성은 밀접하다. 사실, 결정적이다.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이 서술자가 페르소나가 된다. 그의 어조, 그의 시각, 그가 구사하는 문장의 리듬, 관찰하거나 무시할 대상은 주제에 맞게 선택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은 서술자ㅡ혹은 페르소나ㅡ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민낯의 자아에서 페르소나를 빚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이나 시는 창조된 인물이나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작가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작가가 직접 언급할 수는 없지만 핍진하게 전해야 하는 모든 것ㅡ부적절한 갈망, 방어적인 당혹감, 반사회적인 욕망ㅡ을 대리인에게 쏟아부을 수 있다. 반면,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대리인이 아니다. 논픽션 작가는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거리를 둘 수 있는 변명과 낭패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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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렵다 해도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그런 페르소나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조명 도구나 마찬가지다. 이게 없으면, 주제도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회고록이나 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그런 페르소나를 빚어내기 위해 소설가나 시인처럼 자기 성찰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치며, 왜 말하는가, 누가 말하는가를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11-12p)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 상황이란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하며, 이야기란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 「아메리카의 비극」에서 상황은 작가인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살던 시절의 미국, 이야기는 출세욕의 병적인 성질이다. 에드먼드 고스의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 상황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시대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영국이며, 이야기는 친밀한 관계의 배신을 통한 정체성 찾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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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의 주제는 항상 자기 인식이지만, 진공 상태에서의 자기 인식이란 있을 수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회고록 작가도 세상과 교류해야 한다. 교류는 경험을 낳고, 경험은 지혜를 낳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지혜ㅡ더 정확히 말하면, 지혜를 향한 정진ㅡ이기 때문이다. 어느 훌륭한 작문 교사는 이런 말을 했다. "좋은 글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지면 위에서 살아 숨 쉬며, 작가가 무언가를 발견해가는 여정에 있음을 독자에게 납득시킨다."(18-19p)
오웰은 그가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혼자서도 전할 수 있는 이 페르소나를 정치 상황 속에 불쑥 끼워 넣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해서, 오웰 자신은 옹졸한 불안감에 쉽게 휘둘리던 남자였다. 비열한 행동이나 말을 하기도 했다. 수정주의적 관점의 전기들을 보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자 지독한 반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밀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가 논픽션에서 창조해낸 페르소나ㅡ민주적 품위의 정수를 보여주는 페르소나ㅡ는 자신으로부터 뽑아낸 뒤 작가로서의 목적에 맞추어 빚어낸 진실한 존재였다. 이 조지 오웰은 경험과 관점, 그리고 지면 가득 풍기는 개성이 성공리에 합쳐진 결과물이다. 그의 존재감이 워낙 강하다 보니 우리는 서술자를 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우리가 서술자를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의 능력이다.(23-24p)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현상은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요즘의 보편적 믿음에서 비롯된다. 세계 도처의 인권 운동과 일반적인 심리 치료 문화가 이런 믿음을 부추기는데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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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회고록이란,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글을 짓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프리쳇은 회고록에 대해 "중요한 건 필력이다. 인생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칭찬받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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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107-108p)
ㅡ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中, 마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