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24

 

 

저는 이런 게 바로 호러 영화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의 공포 또는 '아무래도 이 세상은 이제껏 내가 믿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듯하다'고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되는 도망칠 데를 잃은 암담한 기분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리는 게 호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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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에이리언>에서 에이리언과 맞닥뜨린 인간은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굳어 버리고는 도망치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멍하니 멈춰서고 맙니다. 그러자 에이리언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느긋하게 이 인간을 삼켜 버리지요. 이 천천히 입을 벌려가는 동안이 무섭습니다. 바로 이게 호러 영화의 연출이지요. 이때 먹이가 된 인간은 아까 말한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고, '이 세상은 자신이 믿어온 것과는 다름'을 질릴 정도로 실감할 게 분명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요.(19p)

 

 

여러분도 보면서 그런 점이 궁금해지지 않던가요? 이 화면에 비치고 있는 것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 영상을 보고 있자면 그만 저런 질문들이 떠올라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공장의 출구>라는 작품은 세계 최초로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프레임 바깥으로까지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는 영상이란 얘기지요. 이는 <춤추는 여자>나 <권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획기적인 진전이자, 영상이 영화로 진화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가 말하고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 조금 아시겠나요? 한마디로 말해,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바깥이 영화에는 있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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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얀 노트에 펜으로 글을 쓰는 행위와도 전혀 다르지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오려내는 겁니다. 눈 앞에 있는 것을 네모난 프레임으로 오려내는 거죠. 이게 영화 제작입니다. 오려낸 것 바깥쪽에는 당연히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것들이 잔뜩, 무한하게 펼쳐져 있기 마련이지요.(85-86p)

 

 

한 가지 덧붙여 두자면, 이 <공장의 출구>라고 하는 영화는 그저 공장 출구 앞에 카메라를 놓고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촬영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움직임 전부가 예정대로 연출된 겁니다. 일종의 픽션인 셈이지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다큐멘터리든 픽션이든 영화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요. 세계로부터 공간과 시간을 오려낸 게 영화입니다. 세계의 일부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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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우리가 응시하는 건 화면에 비치고 있는 무언가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화면에 비치지 않는 것, 비치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지요. 그게 영화입니다.(88-89p)

 

 

이어서 훨씬 까다롭고 각본 작업을 하던 시점에서도 대단히 망설였던 부분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영화 전반부의 경찰서 시체 안치소 장면입니다. 아이카와 쇼가 시신을 인수하러 온 보호관찰사 미야지(시미즈 타이케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다소 뒤늦지만 미야지도 아이카와 쇼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장면이지요. 먼저 아이카와 쇼가 미야지와 재회한 순간, 이 남자가 옛날에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원수임을 눈치채는 순간이 있었지요. 이건 그렇다 치고, 그 직후에 미야지도 아이카와 쇼가 예전에 자신이 죽인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건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요? 아이카와의 얼굴은 이미 소년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나저나 그럼 그 뒤에 아이카와는 자신이 눈치채고 있다는 걸 이미 미야지에게도 들켰음을 깨닫는 걸까요? 깨닫는다고 한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깨닫게 되는 걸까요? 혹시 미야지는 자신이 아이카와의 존재를 눈치챈 걸 아이카와 본인에게도 들켰음을 깨닫는 걸까요?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면, 언제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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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워집니다만, 어쨌든 우선은 이 둘이 얼마만큼 눈치채고 있느냐에 대한 설명을 각본상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는 어느 패턴인가의 설정으로 정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둘의 관계를 거의 억지로 밀고 나갔지요. 그래서 결과는·····. 글쎄요. 완성된 영화를 봤더니, 지금 장황하게 설명한 설정 같은 건 어찌되건 하등 상관없었음을 깨달은 겁니다.

'아이카와 쇼와 미야지는 시체 안치소에서 슬쩍 얼굴을 마주하고,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 무언가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저 이렇게만 해 두고,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둘이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눈치챘음을 깨달았다라고만 설정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둘의 관계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얼마만큼이나 눈치챘느냐와는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어떻게든 될 대로 되고 관객도 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거죠.

이게 영화의 불가사의겠지요. 인연이 있는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하여 슬쩍 얼굴을 마주하고 긴장한 표정을 드러낸 순간,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조리정연함 같은 것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영화 특유의 비현실, 비논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는 듯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세계에서는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하기만 했는데도 뭔지 모를 초능력에 의해 자유자재로 순식간에 뭐든 깨달을 수가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도 서로의 과거 인연을 적당히 알거나 모르거나 하며 자유자재로 어떻게든 될 대로 됩니다. 이렇듯 대단히 불가사의한 비현실의 표현이 영화였단 겁니다.

그리고 이 비현실은 각본으로 쓰려면 대단히 어렵지만 실제로 촬영하는 건 아주 간단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98-100p)

 

 

'그치만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때 아이카와는 납치된 아내를 구출하러 온 거니까, 아무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들 보통은 '아내는 어디 있지? 장소를 말해'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이미 죽었겠군'이라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아내가 이미 죽었다면 구출하러 온 의미도 없다는 게 되잖아요.

이에 각본을 쓴 다카하시 히로시가 열띤 변명을 펼쳤지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건 복수 이야기야. 그러니까 아이카와 쇼는 어느 시점부터 복수를 개시하지 않으면 안돼. 그게 바로 이 지점이지. 여길 놓치면, 그는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식 등을 올리고, 주위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슬픔에 잠겼다가 이윽고 점점 복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라는 대단히 귀찮은 수순을 밟아가야 한다고. 그게 현실이라고 해도, 그 설명만 하다가 벌써 영화는 끝나 있을걸. 그러니까,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하다면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아이카와는 복수를 개시하지 않으면 안 돼.(101p)

 

 

뤼미에르 이전에도 움직이는 영상은 이미 다수 존재하고 있었지요. 그저 여자가 춤추고 있는 것이나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를 통해 권투 장면을 포착한 것 등, 움직이는 사진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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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화면에 비치는 무엇이 아니라 왠지 이쪽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화면에 비치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무언가가 태어났지요. 이는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으로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획기적인 전진이자, 영상이 영화로 진화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습니다.(189p)

 

 

그렇다면 한 쇼트가 연속되기만 한다면, 그 연속되는 시간이야말로 쭉 지속되는 시간 즉 그야말로 진짜 리얼한 현실의 시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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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을 거치지 않은 하나의 쇼트가 어디까지 중단없이 계속되는가'가 최근 제가 영화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큰 테마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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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적어도 '이 쇼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날 것이다'라고 정하는 사람이니, '준비, 스타트'라고 말을 꺼냈다가 어느 시점에서 '컷!'이라고 말합니다. 감독이 거기까지는 지속시키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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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라고 말한 이상 최종적으로는 어찌 될지 몰라도 일단 그 쇼트는 사용하기로 정해지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이게 촬영이라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영화에서 쇼트의 지속을 유심히 보면 바로 거기서 감독이 뭘 하고 싶었는지 제법 분명히 읽힙니다. 또 이는 편집이라는 어딘가 냉혹하고 사기 같은 작업에 좌우되는 게 아니지요. 게다가 보통 각본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연속 촬영할 것'같은 말은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지요. 그러니 이는 감독 개인의 결정권에 맡겨져 있는 부분이라 봐도 될 겁니다.(202-203p)

 

 

개인적으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고 마는 21세기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외측' 혹은 '외부'가 아닐까 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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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에 드러나는 외측', 바로 이게 21세기 영화에 가끔씩, 아니 점점 더 분명히 짙게 감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라는 장소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움직임 혹은 눈에 보이는 안쪽과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는 바깥쪽의 관계를 다룬 영화, 요즘 제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게 그런 영화들뿐이군요.(238-239p)

 

 

 

ㅡ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中,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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