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3

 

 

영화의 고민은 '내면의 외면화' 문제로 모아집니다. '내면'이란 영화감독의 세계관, 지식, 성향, 인식, 관점, 철학, 사유, 정치성 등이 포함된 추상적 관념입니다. '외면화'란 바로 그 추상적인 관념을 소통 가능한 대상으로 구체화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입니다.(12p)

 

 

이런 점에서 볼 때 내면의 외면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도 '외면'도 아닌 '모양이 바뀌다'라는 의미의 '화(化)'인지도 모릅니다. 세계와 마주한 인간의 치열한 사유, 즉 내면도 중요합니다. 대중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 즉 외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피사체를 선택해서 특정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찍은 후 그것을 다시 이어붙이는 지난한 '화'의 과정이 없으면 영화 감독의 내면은 결코 관객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영화감독이란 '화'의 전문가입니다. 영화에서 '화'란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는 방법론적 고민, 즉 영화 언어입니다. 영화감독은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기 전에 그것에 부합하는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을 쌓아가고 대중은 메시지에 공감하기 전에 영화감독이 쌓아올린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에 반응합니다.(14p)

 

 

교수가 강의실에 도착했고 지금 그는 짜증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교수의 상황이 내면이고, 그것이 강의실의 학생들이나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외면'화'입니다. 이것은 영화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다양한 영화 언어가 가능할 것입니다. 첫 번째, "학생 여러분, 오늘 제가 너무나 짜증이 납니다"라는 식으로, 교수 역을 맡은 배우의 입을 통해 해당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나는 오늘 너무 짜증이 난다"라는 교수의 독백을 삽입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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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얼굴을 붉히는 교수의 표정 직후 짜증이 나게 된 상황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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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교수는 열심히 강의를 하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들 대부분이 딴청을 부리거나 엎드려 자고 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도 있습니다. 아홉 번째, 강의실 안의 에어컨 소음이나 강의실 밖 복도 소음을 활용해 관객의 청각을 자극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열 번째, 교수를 포착할 때와 학생을 포착할 때의 렌즈, 앵글, 쇼트 등을 차별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열한 번째, 카메라가 강의실 끝에서부터 교수가 있는 교탁 쪽으로 조금씩 흔들리면서 다가오다가 기어이 교수의 식은땀 맺힌 목젖에 도달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동일한 내면에 대한 다양한 외면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양한 외면화 방식을 통과할 때 동일한 내면은 전혀 다른 성질, 질감, 무게, 부피로 변환될 것입니다. 이 다양한 '화'의 양상 중 방법론적 고민의 강도가 높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의 본질과 가까운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에 근접한 것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한 사례로 생각해볼 때 나는 뒤로 갈수록 고민의 강도가 높아지고 영화의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주장할 것입니다.(16-18p)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명쾌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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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표정이나 동작을 보여주며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놀이, 즉 대사 이외의 비언어적 수단을 시각화하며 내면을 외면화하는 방식이 셔레이드입니다.

약간의 부연이 필요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과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의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의 방법론적 고민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무엇'에 해당됩니다.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은 '어떻게'에 해당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카메라 시선이 아니라 피사체의 시각성에 방점을 찍습니다. '피사체의 지형도'가 셔레이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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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도'란 무엇일까요? 피사체들의 시각적 상황입니다. 얼굴의 표정, 신체 상황, 제스처, 시선의 방향과 상태, 인물 사이의 거리, 공간의 색감과 뉘앙스, 소품의 위치와 특징 등이 어우러진 상태가 피사체의 지형도입니다.(61-62p)

 

 

 

ㅡ 박우성, <영화 언어> 中, 아모르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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