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15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소설로 단숨에 읽을 수도, 작가가 하루에 한 두 문장만 썼다고 말한 것처럼 천천히 읽을 수도 있을 소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인 미당의 “신부” 전문을 옮겨본다.
신 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가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이 마지막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말은 너무나 적확한 말이다. 시에서는 화자인 내가 아닌 부인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는다고 하는데 실은 내려앉은 것은 화자인 내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무너져 내리는 이야기다. 평생에 걸쳐 타인을 부정하며 자신이 진짜라고 믿어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우연히 부여받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는 나에게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 화자와 달리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 우선 고립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봤던 영화 빅쇼트의 오프닝이자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생각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는 타인의 감정, 표정 등을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귀찮아하며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채 외골수로 산다. 독학의 문제와도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사고방식이 굳어지면 타인의 비판은 비난으로 들려서 무시하기 일쑤고 왜곡된 현실인식과 착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왜곡된 현실인식과 착각이 본의 아니게 문제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망칠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조건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늙어서도 계속 배우고, 유머를 즐기며, 친구 및 가족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하는 말이 있다. 단정적이며 이분법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이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들에 비해 오히려 자살률도 더 적고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말이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최악을 생각한다. 어차피 삶은 우연히 주어졌으며 가족은 피바다이자 인생은 지옥이며 앞으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한갓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므로 아주 사소한 즐거움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반대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지내온 삶이 비교적 무탈했을 것이고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늘 세상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자라왔으니 실패를 경험해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연유로 그런 성향을 지녔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실패로도 무너질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지만 솔직히 삶은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살라는 말은 아니지만 살인자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선사하는 운명의 장난이 어느 누구에게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웃기지도, 웃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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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표정은 풀기 어려운 암호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법석들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울면 짜증이 났고 웃으면 화가 났다. 시시콜콜 얘기를 늘어놓을 때는 참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41p)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42p)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51p)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처음 읽고는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다니.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자 왕이 된 그는 신들을 분노케 한 범인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 범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은 수치였을까. 죄책감이었을까. 어머니와 동침한 것은 수치요, 아버지를 죽인 것은 죄책감이었겠지.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은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128~129p)
ㅡ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