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31
이 책은 비단 혼자 사는 1인가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알코올의존자가 많은 사회는 애초에 알코올 소비량이 높은 사회라고 말한다. 폭행 사건이 많은 사회는 폭력적인 사회이며, 성폭력이 잦은 사회는 성차별이 일상인 사회이다. 한 집단이 경험하는 문제는 그 집단이 살아가는 사회에 만연한 징후를 드러낸다. 1인가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 수면 아래에는 각자도생해야 하는 무한 경쟁의 사회가 자리하고 있다.(8-9p)
지구 위의 개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동서남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태양 주위를 서에서 동으로 함께 공전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무관하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라는 판 자체가 구조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1인 가구의 증가도 이와 같다. 한 개인이 혼자 살게 된 배경은 매우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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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인 가구의 증가를 개인의 선택들이 모여 우연히 도달한 결과라고만 볼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라면, 왜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1인가구가 폭증하는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혼자의 시대로 함께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개인이 혼자 살고 싶다고 해서 혼자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굳이 조부모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바로 앞 세대만 보아도 개인주의적 성향이나 가난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개인의 성격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에서 탈출하려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시대가 그러한 선택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싱글을 권하는 사회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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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서비스업 중심의 후기산업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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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의 완전고용과 종신고용은 점차 사라지고, 노동시장은 서비스업의 특성에 맞게 급격히 유연화되었다. 계약직, 파트타임, 프리랜서, 성과연봉제 노동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지방이든 해외든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24시간 언제든 일에 투입될 수 있으며,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1인가구가 유동하는 지금의 노동시장에 최적화된 가구 유형이 되었다. 그렇게 산업구조라는 거대한 판의 이동 위에서 우리는 더욱 쉽게 혼자 사는 삶을 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에 최적화된 선택이 인간의 안위에도 최적화된 선택인 것은 아니다. 혼자 남겨진 공간에서 각 개인은 부실한 식사, 돌봄의 공백, 신체 건강의 위협, 정신 건강의 위기와 맞닥뜨리고 있다. 만약 홀로 사는 삶이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라면, 이 그림자 또한 결국 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일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 흐름의 결과라면,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위기를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것일까?(32-34p)
세현 씨와 하은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준거집단효과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고립된 상태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료들, 그들이 당연시하는 삶의 방식, 그 집단에 흐르는 분위기가 선택의 기준점을 형성한다. 결혼과 육아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여겨지는 공공기관에서는 그 규범이 개인의 선택을 견인하고, 반대로 탐욕스러운 일자리가 지배하는 금융·전문직 분야에서는 독신 중심의 규범이 삶의 청사진을 재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선택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만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떤 삶을 '정상'으로 목격하느냐에 좌우된다.(68-69p)
승민 씨는 행정복지센터나 사회복지기관의 문을 두드린 적이 없다. 남에게 손 내밀기에는 " 아직 젊다는 생각"이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했다. 그래서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도 찾아가는 데 심리적 장벽을 느꼈다. 그 결과 그는 사회복지기관과 연결된 다른 저소득층보다 훨씬 취약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승민 씨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낯선 타인과의 교류를 불편해한다. 누군가를 의무감으로 만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고소득 1인가구들은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을 선별해 사귀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줄이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 결국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반면 저소득 1인가구들은 경제적 결핍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회복지제도에 기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의무적인 교류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들의 사회자본을 회복시켰다. 어떤 맥락에서 시작되었든 새롭게 형성된 사회자본은 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173p)
그러니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솔루션으로 제안되는 자기돌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이미 모순이다. 건강해서 돌봄이 별로 필요 없을 때는 혼자서도 잘 챙길 수 있다. 요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영양제도 먹는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 정말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1인가구에게는 서로의 생명을 살릴 상대가 없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살림은 타인을 돌봐야 하는 부담도 없지만 자신을 살릴 사람도 없는 위태로운 외발자전거 같은 살림이다.(194-195p)
이처럼 연령, 성별, 직업의 차이를 막론하고 1인가구에게 살림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가깝다. 요리는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서 '배를 채우는 일'로, 청소는 '함께 사는 공간을 돌보는 일'에서 '견딜만한 수준의 정돈'으로 바뀐다. 살림은 생명을 살리는 행위에서 생명을 겨우 붙드는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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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돌봄을 받는 대상도 나 자신"인 1인가구에게 살림의 동력은 '자기 마음'이 된다. 그래서 마음에 의욕이 넘칠 때는 살림도 수월하게 하지만, 정작 어디가 아프거나 허한 마음이 되어 돌봄을 받아야 할 때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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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 상태에 기대는 1인가구의 살림은 본질적으로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준 씨의 표현처럼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엉망진창과 성실함"을 오가며 널뛰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의욕이 없는 순간에조차 밥을 챙기고 청소를 하게 다그쳐서 생활의 최저선을 지키도록 만들어주는 식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잔소리할 사람이 없는 삶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취약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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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참여자들과 이야기하다가 흥미로운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봐주는 사람"이란 말이었다. 꼭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는 타인만 있어도,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강현욱 씨의 설명이다. 혼자 살다 보면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옷도 대충 입게"되고,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외출할 때도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가게 된다. 현욱 씨는 누군가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깔끔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198-200p)
결국 이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나를 봐주는 존재였다. 곁에서 잔소리를 하는 사람, 같은 집에 살거나 내 집에 수시로 오는 사람, 내가 혹시 쓰러지면 119를 불러줄 사람.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본다'는 표현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오인용에게 그랬듯 타인의 시선은 보통 불편한 것 아니었던가. 왜 이들은 그걸 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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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 씨가 애인 때문에 집을 치우기 시작한 것은 감시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가 그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가 자신도 좋아서 습관이 된 것이다. 현욱 씨 역시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깔끔도 떨고"라고 말할 때, 그것은 통제나 감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기돌봄의 회복을 의미했다. 타인의 시선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타인과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시선이 갖는 이 오묘한 순기능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우리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그 타자의 현존이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주한다'는 것이다. 판옵티콘의 일방적 감시와 달리 이 시선은 쌍방향이다. 이처럼 마주하고 응답할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나를 보아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살피게 된다. 그것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책임감이다. 그렇게 관계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돌봄이 자연스럽게 깨어난다. 그것이 '봐주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안에는 이 타자의 얼굴이 없다. 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외출하려 해도, 나은 배달 음식으로 세 끼를 채워도, 집안에 쓰레기가 계속 쌓여 쓰레기집이 되어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202-204p)
그러나 이미 다 자한 어른이 되었어도 우리는 힘들 때 타인의 도움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곤 한다. 친구와 통화하며 불안을 가라앉히고, 가족과 식사하며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애인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집을 치우게 된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때로는 위로받고 때로는 눈치 보며, 타인을 통해 자신을 조절해 온 존재들이다. 그래서 평소 가까이서 서로를 조율해 줄 타인이 없는 1인가구의 살림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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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인가구에게 필요한 돌봄관계는 많은 사람과의 얕은 관계가 아니다. 소수라도 집으로 거리낌 없이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깝고 신뢰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단지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모은다고 해서 형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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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관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를 향한 관심, 상대를 책임지려는 마음, 기꺼이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을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216-217p)
경제력이 있더라도 쉽사리 외주화하지 않는 집안일도 있다. 청소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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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소하는 용역 분들 하루에 5만 원 정도 하니까 그걸로 해서 화장실에 구석구석의 숨은 때들 좀 벗겨낼 수 있다면 그런 거 좀 해보고 싶은데. 아직 그 정도 경제 상황이 안 돼서 항상 생각만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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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경제적 여유가 되는 고소득 1인가구들도 청소서비스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생활 보호와 취향 때문이다. 스타트업 대표 문도영 씨는 몇 번 청소서비스를 이용해 본 이후에 자신이 직접 청소한 것보다 "깔끔함의 정도가 더 낫지 않다"라고 판단해 서비스 이용을 그만두었다. 30평대 아차트에 사는 희명 씨는 가끔 혼자 청소하기가 버겁기도 했다. 인터뷰 참여자 중 가장 고소득인 희명 씨에게 “4~5만 원은 대단히 비싼 건 아니지만" 누군가 자신의 사적 공간에 들어와서 자신만의 세팅을 흐트러뜨리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청소서비스를 부를 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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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데 익숙해진 이들은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 자신의 세계와 질서에 개입하는 일을 꺼렸다. 세탁서비스나 배달 음식이 편리한 이유는 바깥에서 비대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섬주섬 옷 매무새를 살필 이유도, 배달원과 어색한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다. 하지만 집안 공개가 불가피한 청소서비스는 다르다. 타인과의 교류가 동반되기 때문에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배달 음식과 세탁서비스를 애용하는 고소득층 1인가구라도 청소서비스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사용했다. 나빠서 집안이 어수선하더라도 남에게 보이느니 그냥 그대로 둔다.(257-259p)
비혼 1인가구들은 어느 순간 미묘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가족 안에서 누군가가 아프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주로 혼자 사는 쪽이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잠깐 도와주려던 것이 어느 순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혼자 살기 때문에 한갓진, 그래서 항상 여유분의 시간이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284p)
이런 행사에 초청을 받게 되면 부조금을 챙겨야 한다. 그러나 비혼 1인가구들에게는 특별한 가족행사가 없기에 일방적으로 축하금을 내는 경험을 오랜 기간 계속하게 된다.(293p)
부모가 돌아가시면 "혼자만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희은 씨의 위기감은 많은 장년기와 노령기 1인가구들에게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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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씨는 20년 동안 부모의 돌봄을 전담하면서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가족의 일원이라고 느낄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그 역할을 잃었다. 숙희 씨가 부모를 돌볼 때는 오빠와 동생이 수시로 고마움을 표현하며 연락과 왕래를 자주 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까지를 내 가족으로 포함하느느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연락이 뜸해지면서, 결국 "자기 혼자"만 남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형제자매와 자신을 잇던 부모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형제자매의 가족 내에서 자신의 입지도 줄어들게 되었다.(297-298p)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1인가족이 된 것이 가족들과 감정적으로 틀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족 안에 묶어두던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부모가 있을 때 1인가구는 부모 돌봄을 매개로, 조카가 어릴 때는 지원을 매개로 형제자매와 관계가 이어진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조카들이 성장하면서 1인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기능적 연결고리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302p)
이들이 혼자 아픔을 견디는 이유는 "폐를 끼치기 싫어서"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엘레나 포르타콜로네은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싱글들에게 바람직한 표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몸이 아파 마땅히 타인의 도움을 구해야 할 때도 타인에게 돌봄을 부탁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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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혼자만의 투병이 일상의 병치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건강 악화 앞에서도 이 패턴은 유지된다. 「고잉 솔로」의 저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자립심이 1인가구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나아가 고독사를 이끈다고 비판한다. 그는 1995년 시카고 폭염 당시 수많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놀랍게도 이들 중에는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로 인한 건강 악화마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채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자립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존성에 낙인을 찍는 문화로 인해 1인가구가 사회적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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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게 아팠던 경험은 1인가구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전통적인 생애주기에서는 결혼, 출산, 분가, 사별처럼 가족구성원의 변화가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가족적 사건을 경험하지 않는 1인가구들에게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생애사적 사건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대부분이 자신의 건강 변화를 꼽았다. 특히 내가 만난 중장년 1인가구는 예외 없이 신체의 노화가 가속화되는 40대 전후를 생애 최대 전환기라고 답했다.(324-326p)
주변과 관계를 맺으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자기가 인식되는 게 있는데, 사람을 안 만나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나에 대해 누군가 얘기를 해주거나,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나를 생각하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런 것도 안 되니까 혼자 그냥 갇혀서 생각하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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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얻게 되는 역할과 정체성은 우울감에 빠졌을 때 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민석 씨의 표현으로 말하면, 힘들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다가도, 가족은 "삶의 끈을 잇는 연결고리"가 된다. 가족을 향한 책임감은 개인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붙들어 매는 애착의 끈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벡과 벡-게른스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과 공동체와의 상호의존적 관계는 "개인의 삶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닻"이라고. 그런데 1인가구에게는 땅에 삶을 붙박아줄 관계의 닻이 부실하다. 그래서 결국 "죽음도 가볍게 여기기 쉽다"는 것이 민석 씨의 설명이다.(335p)
고독사 뉴스에서는 '누가,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가?' 대신에 '어디서, 얼마나 심한 모습으로 발견됐는가?'가 더 주된 관심사다. 그가 살아가면서 세상에 남겼을 추억이나 온기는 미디어에는 좀처럼 담기지 않는다. 수십 년의 자취보다 사망 현장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더욱이 미디어는 고독사한 개인의 질병, 장애, 빈곤, 심리적 이상 등을 강조하면서, 고독사의 부정적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에 따라 고독사는 단지 혼자 맞은 죽음이라는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맞는 가장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덧입게 된다.
내가 만난 1인가구들도 미디어가 프레임한 고독사 담론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고독사 현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기사와 사회의 반응을 반복 학습하면서, 자신도 사후에 이런 부정적 시선의 대상이 될까 봐 무서워했다.(341-342p)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나의 노력'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탄탄한 커리어를 쌓으면, 재테크로 노후 준비를 착실히 하면, 균형 잡힌 식단과 운동으로 건강을 잘 챙기면, 명상하고 상담받으며 정신건강을 관리한다면, 내 삶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1인가구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상호의존성. 바로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363p)
ㅡ 김수영, <필연적 혼자의 시대> 中,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