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이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31p)
그럴 듯한 말이다. 영화에 빗대어 볼까? 나만 해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최초로 상영된 영화이니 뭐니 떠들 수 있다. 그 뿐인가. 나는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몽타주의 개념과 서로 간의 차이점에 대해서 떠들 수 있다. 재밌는데 계속해볼까. 트뤼포,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의 작품의 보지 않고도 점프컷이나 브레히트가 말했던 소격효과와 같은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작품을 대략적으로 듣기만 했어도(대표적으로 싸이코의 샤워씬)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서스펜스를 쌓아올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피스, 장 르누아르, 오손 웰즈, 존 포드, 타르코프스키, 루이스 부뉴엘, 잉마르 베리만,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감독들의 목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 플로베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담보바리, 감정교육, 부바르와 페퀴셰 등의 저작들을 꼭 다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본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 각각의 목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위치를 파악하기만 해도 그 책에 대해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ㅡ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中, 여름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