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5/8
서장원의 '히데오'가 베스트.
길란의 작품이 가장 무난, 이미상의 작품은 역시나 제일 웃으면서 봤고, 위수정은 다른 작품은 어떤지 조금 궁금해짐. 나머지는 딱히...
물론 그냥 올린 것은 아니었다. 이삭 오빠의 눈썹 위치와 드러나는 치아의 밝기까지 수정했다. 별것 아닌 거 같아 보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서 이미지라는 것을 만드는 법이었다. 백모도 마찬가지였다. 백모는 너무 악에 받쳐 보여서도 안 됐고 너무 불쌍해 보여서도 안 됐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불행한 사람을 싫어하니까. 그렇다고 너무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질투를 살 수 있었다. 원래라면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지금은 내가 동정할 수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 사람. 백모의 이미지는 딱 그 정도가 좋았다. 그걸 위해서 백모의 옷차림, 헤어스타일, 화장법까지 모두 지시했다. 촬영할 때에는 구도와 배경의 배치, 빛이 들어오는 각도까지 신경썼다. 이미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편집해서 잘라냈다.(60-61p)
그런 거였다. 단순히 안타깝고 불쌍하기만 해서는 안 됐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품위가 필요했다. 돈이 만들어주는 품위가. 그것만 있으면, 너무도 쉽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68p)
"기사도 났던데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백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거리며 말했다.
"넌 뉴스도 안 보니?"
"네?"
나는 되물었다.
"누가 일하다 죽었다는 뉴스는 매일 올라와.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쓰디?(69p)
<따귀 게임>은 어느 고등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위원회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넷인데, 학폭위의 내부 위원인 교사 둘과 학폭위를 요청한 모범 소년, 그리고 학폭위에 회부된 불량소년이다. 모범 소년은 불량소년에게 매일 따귀를 맞았다고 신고했으며 이 혐의는 불량소년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불량소년은 모든 폭력이 모범 소년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작가 지망생인 모범 소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모범 소년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불량소년은 말한다. 그래서 모범 소년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받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에 값을 매겨 매일 저녁 모범 소년을 때려주었다는 것이다.(152p)
히데오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마주했던 복잡한 감정들도 말해주곤 했다. 역사 시간이나 국어 시간에 들려오던 일본에 대한 말들, 혐오와 경멸로 범벅이 된 그 말들을 히데오는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히데오는 한국인 어머니를 모욕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어린이들과 원어민 일본어 교사를 쪽발이라고 부르던 고등학생들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고 말하면서도 그걸 똑같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인종차별이 맞지. 아니면 그걸 뭐라고 해?"
나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대꾸했다. 히데오가 겪은 일들, '쪽발이'니 '섬숭이'니 하는 말들은 당연히 인종차별이 맞겠지만 한국인이 일본과 일본인을 싫어하는 걸 그저 인종차별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생각하면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히데오 역시 그런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한국이랑 일본 사이엔 과거가 있잖아."
(...)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가 있고 그것은 전혀 청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죄를 히데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등학교 일어 교사가 공공연하게 쪽발이란 말을 들었던 것은 분명 인종차별이고 제노포비아라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히데오에게는 그런 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겠지만.(158-159p)
그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 속 양자경의 이미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있잖아, 누나,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히데오는 그렇게 말했는데, 그 말이 내게는 상처받지 않은 자신, 따돌림도 비밀도 없는 성장기를 가지고 싶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리고 나는 거의 직관적으로 영도를 떠올리게 됐다.
"그런 사람은 좀····· 끔찍할 수도 있지 않을까?"
(...)
히데오는 그런 영도가 끔찍하다는 데 동의했지만, 내가 왜 자신과 영도를 연결시키는지, 어째서 또다른 자신이 영도 같은 사람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상처받지 않은 자신, 따돌림도 비밀도 없는 성장기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나도 어떤 이유에서 두 사람을 연결시키게 된 건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161-163p)
동갑내기 부부인 운주와 경수는 마흔세 살이었고 그 나이는 이십칠 세가 그러하듯 의미심장했다. 늙음을 일찍 뒤집어쓰고 싶어지는 나이. 스물일곱 살 때 운주는 서른 살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오늘날 경수는 병원에서 전립선 질환을 앓는 오륙십대 사이에 끼어 자신도 '내일모레면 오십'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늙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미리 늙어버려 노화의 공포를 잊으려는 것이다. 제일 먼저 매를 맞으려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241p)
운주는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꼴찌를 했다. 이사한 동네에서는 잘살기는커녕 중간 축에도 못 꼈다. 손상된 자존심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과일이 들어 있는 과일 칸으로? 새로 사귄 친구들의 냉장고 과일 칸에는 머리 좋아지는 값비싼 한약이 가득했다. 운주는 새 동네에 옛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머플러에 종아리를 데었다. 운주에게는 선숙이 필요했다. 살면서 초라함을 느낄 때마다 운주는 선숙을 통과하여 스스로를 고양했다.(253p)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
선화가 말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모든 책에서 구원은 적의 공습 뒤에 찾아왔다. 적들이 온다는 것은 긴긴 괴로움으로 뭉쳐진 기다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기다림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선화는 매일 찾아오는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산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이 고된 기다림을 끝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난 게 대단한 운명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
끝내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발령받은 근무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기서 기상천외한 사람들을 연달아 맞닥뜨렸다고 했다. 학생들이 단합하여 폐가를 불태우거나, 오래도록 의좋게 지낸 이웃이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듯 끊임없이 훔치는 꼴도 보았다. 어느 여름에는 도시에서 찾아온 이들이 내내 벌거벗고 해변을 돌아다녀, 그들의 알몸과 대치하고 옷을 입으라 설득도 했다.
"저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요."
(...)
"그럼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요."(315-316p)
ㅡ 김채원 외,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