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
기억 속에 저장된 매슈와 마크의 사진에서 피오나가 본 것은 어떤 의도도 어떤 목적도 없는 무효였다. 아주 작은 난자 하나가 일련의 화학적 이벤트를 진행하던 도중 어딘가에서 일어난 문제, 단백질 연쇄반응의 미미한 오류 때문에 제때 분열하지 못했다. 분자에서 시작한 사건이 우주대폭발처럼 더 큰 규모의 인간적 불행으로 팽창한 것이었다. 그건 잔혹행위도, 누군가를 향한 복수도, 알 수 없는 유령의 짓도 아니었다. 단지 유전자 전사의 오류, 효소 합성의 왜곡, 화학적 결합의 단절일 뿐이었다. 무의미하고도 무심한 자연의 낭비 과정. 건강하고 완벽한 형태의 생명을, 역시나 우발적이고 역시나 목적 없는 그런 생명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 과정이었다. 신체 각부가 적절한 형태로 제자리에 달려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잔인하지 않은 깊은 애정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난다는 것, 혹은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인 우연으로 전쟁이나 빈곤을 모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연한 행운이었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이 되기가 훨씬 쉽다는 것도.(46~47p)
컵을 들고 복도를 따라 되돌아오며 피오나는 벌써 자신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위반 행위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남편의 합법적인 접근권을 방해하다니. 그것은 파국을 맞은 결혼생활에서 상투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며, 자문을 맡은 사무변호사는 의뢰인에게(보통은 아내에게) 법원명령 없이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소란 행위를 굽어보며 충고하고 심판하는 일을 하며 살아왔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혼하는 부부들의 악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태도에 고매한 논평을 하던 자신이 이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곳으로 내려와 그 삭막한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72p)
이 아이가 죽건 살건 사실 별 상관이 없다는 불경한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게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깊은 슬픔과 어쩌면 쓰라린 후회와 정겨운 추억을 뒤로하고 삶은 다시 계속되겠지. 아이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이 들고 죽어가면서 슬픔도 후회도 추억도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을 것이다. 종교나 도덕체계는(내 종교와 도덕체계도 마찬가지로) 멀리서 바라보는 산맥의 빽빽한 봉우리들 같아서,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눈에 띄게 높거나 더 중요하거나 더 진실하지 않다.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154~155p)
그는 이중잣대의 불합리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식이 그를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었다.(283p)
ㅡ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中, 한겨레출판